▲한태상 사장이 가전제품을 수리하며 352테스트기로 건전지의 전류(암페어)를 측정하고 있다.
<무한정보> 이재형
1960년부터 30여 년 동안 농촌지역 읍면소재지에서 성업을 했던 가게 중 대표적인 것이 '전파사'다. 농촌 전기 공급으 로 기계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그와 함께 들어온 라디오, 카세트, 흑백텔레비전 등을 수리하는 몫을 맡았다.
그곳에선 음악 소리와 라디오 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텔레비전이 처음 나왔을 땐 시골 꼬맹이들이 가게 유리창 안을 구경하느라 까치발을 서가며 머리통 싸움을 해댔다.
어디 그뿐인가. 요술상자 같은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뜯어놓고 납땜을 해가며 수리를 하는 가게 사장님의 모습을 보며 장래의 꿈을 키운 소년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게 읍면 소재지마다 성업을 했던 전파사들이 이젠 시대변화에 밀려나 역사의 뒤안길로 접어든 지도 오래다.
충남 예산군 고덕면 소재지에는 1960년대에 이일대(고덕, 봉산, 면천 등) 최초로 전파사를 열었던 가게가 지금까지 문을 열고 있다. 고덕사거리에서 남쪽, 면사무소 방향으로 조금 더 가면 보이는, 간판이 허름한 '대우전자 고덕대리점(옛 고려전파사)'이 그곳이다. '말자'가 개명을 했어도 여전히 말자네 집으로 불리듯, 지역 주민들은 이곳을 아직도 '고려전파사'라고 부른다.
10평 남짓한 엉성한 가게 안에는 제때 팔지 못한 제품들이 먼지를 쓰고 있다. 한태상(81) 사장은 뒤통수가 나온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1967년 현재 가게 건너편에 세를 얻어 문을 연 뒤로 50년 세월 동안 면 소재지를 지켰으니 이 업계는 물론이고 지역의 산증인이다.
"처음 가게 문을 열었을 땐 '고려무선'이었어요. 한참 뒤에 '전파사'로 바꿨지. 내가 처음 시작했을 땐 삽교, 덕산에도 없었고, 예산읍에 주교무선과 신흥사 딱 두 곳뿐이었어." 그때만 해도 고덕이 쌀 주산지였기 때문에 부자들도 많고 상권이 커서 자연스럽게 수요가 생겼다.
"일제 내쇼널·소니라디오가 부잣집에나 있을 때지요. 이런 라디오 한두 대 있는 곳이면 부촌이라고 했지. 고덕 전체를 통틀어 100대 정도나 됐으려나. 선거철이 되면 라디오 있는 집으로 다 모여서 뉴스를 듣고 그랬어요. 금성사에서 부락별로 이장 집에 라디오를 놔주던 시절도 있었고…."
라디오는 1945년 미 군정이 광석 라디오를 들여오면서부터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1950년에 나온 제니스 트랜스오셔닉 라디오는 당시 쌀 50가마 가격이었다. 1957년에는 공보처가 진공관이 5개인 필립스 5구 라디오를 수입해 공급했다. 1959년에 금성사가 국내 최초로 A501 금성 라디오를 만들었다. 그리고 1960년에 트랜지스터 6석 라디오를 본격 생산했고, 당시 국내 라디오 보유 대수는 40여만 대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