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사랑한다>.
MBC
고려 최초로 몽골인 왕비의 몸에서 출생한 충선왕은 스물네 살 때인 1298년 아버지를 몰아내고 고려 주상이 되었다. 하지만 7개월 만에 아버지한테 도로 내주고 몽골 수도인 대도로 소환됐다. 대도는 지금의 베이징 절반과 그 북쪽에 걸쳐 있었다.
복귀한 충렬왕은 아들한테 두 번 다시 빼앗기지 않으려고 몽골 조정에 로비를 많이 했다. 아들이 돌아올 수 없도록 붙들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하지만 충선왕도 살아날 방도를 강구했다. 몽골 황실의 권력투쟁에 개입해, 장차 승자가 될 카이산을 후원하는 행운을 얻었다. 카이산은 1307년 대칸(황제)이 됐고 충선왕은 막강한 배경을 얻게 되었다.
카이산은 답례를 했다. 몽골의 지방 제후 지위였다. 1307년 혹은 1308년 충선왕을 고려 이주민들이 많이 사는 심양로 제후로 책봉했다. 로(路)는 행성(行省) 밑의 2급 행정구역이었다.
심양로는 심양(션양)을 중심으로 한 행정구역이었다. 심양은 경도 상으론 신의주보다 약간 서쪽이고, 위도 상으론 백두산보다 약간 남쪽이다. 심양왕은 지금으로 치면 심양시장이 아니라 심양 담당 부총리 같은 것이었다. 심양왕은 1310년 심왕으로 개칭됐다.
충선왕은 심양왕이 된 상태에서, 아버지가 죽은 뒤 고려 주상에 복귀했다. 고려 주상 겸 몽골 심양왕이 된 것이다. 형식상 2개의 왕을 겸하게 된 셈이다. 노르망디공인 상태에서 영국왕이 된 윌리엄 1세처럼, 충선왕은 심양왕인 상태에서 고려 주상이 됐다. 심양은 만주 땅의 요지다. 발해 멸망 이후, 제후 신분으로나마 만주 땅의 군주가 된 것은 충선왕이 처음이다.
카이산이 충선왕을 심양왕에 책봉한 진짜 이유그런데 카이산이 충선왕을 심양왕에 책봉한 것은 단순히 보은 차원만은 아니었다. 사실은 몽골 황실의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칭기즈칸 이래로 몽골이 팽창하는 과정에서, 그의 세 아들과 후손들이 만주 땅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황제 지위 쟁탈전에도 개입했다.
몽골 황실은 이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투항한 고려인 세력가인 홍복원 가문을 활용했다. 고려 입장에서는 반역자인 홍복원 가문한테 대대로 벼슬을 주고, 만주에서 세력을 형성한 칭기즈칸 후예들을 이 가문을 통해서 견제했다.
이 과정에서 홍복원 세력이 너무 강해졌다. 고려와 몽골의 전쟁 중에 고려에서 피신한 이주민들이 홍복원 관할 하에 들어감으로 인해 생긴 결과였다. 이제, 몽골 황실은 또 다른 고려인 세력가를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목적으로 활용한 사람이 고려 왕족 왕준이다. 한때 몽골은 왕준을 앞세워 홍복원 가문을 견제하는 동시에, 왕준과 홍복원을 함께 내세워 칭기즈칸 후예들을 견제했다. 왕준과 홍복원이 상호 경쟁하면서도, 칭기즈칸 후예들을 상대로는 공동보조를 취하도록 한 것이다.
카이산이 충선왕을 심양왕에 책봉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왕준의 자리를 충선왕으로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카이산은 심양왕이란 세습직 제후직까지 줌으로써, 충선왕이 강력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도록 도왔다. 충선왕이 홍복원 가문에 제동을 걸면서도, 필요할 때는 홍씨 가문과 힘을 합쳐 칭기즈칸 후예들을 견제해주는 게 카이산의 바람이었다.
카이산은 그런 동기로 심양왕에 책봉했지만, 충선왕 입장에서는 고려 땅 바깥에 또 다른 땅을 갖게 됐으니 개인적으로 대단한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세계 최강인 몽골 영토 안에 자기 땅을 갖게 됐으니, 국제적으로 상당히 높은 위상을 확보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