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엔 솜구름, 밤에는 별들의 향연... 몽골에 취하다

가족과 함께한 몽골 여행... 곳곳에 남겨진 전통 속 역사

등록 2017.08.21 15:28수정 2017.08.21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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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청동기마상 앞에서 가족일행과 함께 손녀와 손자는 어디를 갔는지 보이질 않고, 기마상 뒤편의 하늘과 구름이 퍽 아름답다. ⓒ 김병하


오랜만에 여름휴가철에 맞추어 온가족이 함께 몽골 여행길에 올랐다. 중앙아시아 넓은 초원의 나라 몽골은 전체인구가 불과 3백만 명이지만, 국토는 우리 남한의 17배가 넘는다. 근데 전체 인구 300만 중 그 절반이 수도 울란바타르에 집중해 있어, 그곳은 도시화에 따른 온갖 공해와 불평등의 총본산지가 되어 버린 게 아닌가 싶다.

고층아파트가 군데군데 보이고, 새로 건축 중인 아파트도 많이 보인다. 이곳 아파트는 평당 1천5백만 원 이상을 호가한다니 아파트 입주는 엄청난 부의 상징이 된다. 그에 비해 노인층은 여전히 전통 게르에서 소박한 삶을 유지하는 게 몸에 배어 있단다. 긴 겨울철(10월 중순에서 5월 말까지) 동안은 유연탄에서 뿜어내는 독한 가스로 인해 앞이 보이질 않을 정도로 도시 전체의 공기가 탁하다니 이곳 울란바타르의 겨울은 이래저래 살기 힘든 곳이다. 그래도 몽골에서 190여개가 넘는 대학들이 모두 이곳에 집결되어 있다니 젊은이들에게는 여전히 출세의 출구가 될 수밖에 없는 로망의 도시다.


<총․균․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나라간의 빈부격차는 적도로부터 떨어진 거리와 항해할 수 있는 해양과의 접근성에 결정적으로 연관된다고 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몽골은 지리적 환경 자체가 경제발전에 불리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하비는 <세계를 보는 눈>(최병두 역, 2016)에서 나라간의 빈부격차는 지리적 조건과 무관하며, 역사적․문화적으로 구축된 제도의 틀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몽골이라는 나라에 대해 풀리지 않는 하나의 큰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몽골을 상징하는 칭기스칸은 1206년 몽골고원의 유목민들을 통일하고 '대몽골 울루스'의 기틀을 세운 이래, 1260년 이후에는 느슨한 울루스들의 연맹으로 대제국의 기초를 마련했다. 몽골제국은 13~14세기 유라시아 지역을 연결시키고 통합하는 대제국을 꾸준히 형성해 갔다. 심지어 칭기스칸은 신 앞에 모두가 평등한 제국을 건설하기를 꿈꿨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에 <칭기스칸, 신 앞에 평등한 제국을 꿈꾸다>(잭 웨더포더, 이종인 역, 2017)라는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지금도 몽골인들은 칭기스칸을 붓다, 예수, 무함마드 등과 비견되는 정신적 지도자이자 종교적 스승으로 여긴다.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는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2010)에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의 탄생을 이렇게 평가한다.

"그들은 제국의 통치자로서 주체적인 판단과 기호에 따라 여러 문화적 요소들 가운데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선택'하였고 후원하였다. 그런 면에서 몽골인들은 유라시아를 아우르는 통합적 문화요소를 창출해 내는 데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팍스 몽골리카는 몽골 세계제국의 건설로 인해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몽골인들의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활동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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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밤 우리들 숙소였던 게르 앞에서 집사람과 함께 이곳 게르에서 이틀밤을 집사람과, 딸 태영이 그렇게 세사람이 함께 잤다. ⓒ 김병하


지금 우리는 '지구촌'이니, '세계화'니 하는 말을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지만, 그 원류는 몽골제국의 건설과 그 통치력에 맞닿아 있다. 몽골제국은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정교한 역참(驛站)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대여행의 시대' 나아가 '대항해의 시대'를 탄생시켰다. 전성기의 몽골제국은 모두 6만Km에 이르는 역참 네트워크를 운영하기 위해 1400 개소 이상의 역참을 설치해, 역참 전령들이 사용할 말을 20만 마리나 배치해 놓았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대항해의 시대'는 곧 '근대세계 형성'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몽골제국이 이룩한 세계관의 확대를 전제로 가능했던 게다. 그 이래로 유럽은 해양지향적이었던 반면에 아시아 지역 나라들은 내륙 지향적 전통에 머물렀다. 몽골지배가 남긴 명암이 유럽과 비유럽 세계의 운명을 갈라놓는 역사적 전환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김 교수는 "해양을 장악한 유럽의 성공은 몽골제국이 남긴 정치적·군사적 부담인 '내륙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으면서도, 몽골의 시대가 남긴 '세계사의 탄생'이라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고 했다. 그렇다할지라도 한때 세계를 제패한 몽골의 지금 모습은 너무 초라한 게 아닌가 싶다.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는 내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는다. 하지만 그런 의문은 몽골여행 이튿날 '몽골국립박물관'을 관람하면서 설명을 듣는 동안 차츰 해소되어 갔다.


몽골을 중심으로 한 '요하문명'은 중국의 '황하문명'보다 약 2천 년이나 앞선 문명으로 애초에 요하문명은 황하문명에 영향을 미쳤던 게다. 여기서 우리는 터기-몽골-한반도로 이어지는 문명의 연결고리와 그 네트워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실 내가 몽골을 여행하면서 그들의 외모는 물론 전통적 토템 신앙의 형식이나 불교문화 저변에 흐르는 정신적·정서적 지향성이 우리와 많이 상통한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특히, 여행 중에 몽골인의 주거 삶을 체험하는 초원의 게르(Ger) 민가를 방문해서 차와 간단한 다과를 대접받으면서 직접 그들 문화와 원주민의 평화로운 미소를 접하니 더욱 친근감을 가지게 되었다. 게르 내부의 구조와 가구는 극히 간편하고 소박했지만, 그 곳은 먹고 담소하고 잠자는 그들 삶의 안식처였다. 게르 내부의 한 쪽 작은 탁자 위에 달라이 라마 사진도 보이고 중앙에는 그들 전통 토템 신앙을 상징하는 작은 촛대 같은 게 있고, 그 옆에는 성모 마리아 사진이 작은 액자에 들어 있다. 가족 구성원들의 다양한 종교 의식이 한 곳에 나란히 진열되어 있어, 그들의 종교 다원성(개방성)이 확인된다.

몽골에서 4박5일 머무는 동안 이틀 밤은 초원의 게르에 숙소를 정해 직접 몽골 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몽골의 초원은 광활하면서도 그 초원의 풀을 뜯어 먹는 말들을 보노라면 그 정경이 참 평화롭다. 몽골 소년이 다리를 곧게 쭉 편 채로 말을 타고 능숙하게 달리는 모습을 보니, 어릴 적에 낙동강 변에서 소타고 노닐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이곳의 해지는 시각은 우리보다 두어 시간은 늦어, 밤하늘의 별을 제대로 보려면 현지시간으로 오후 10시가 넘어야 한다.

우리 가족은 별자리 관찰을 위해 오후 10시 반경에 초원의 평상(平床)에누운 채로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가리키며 또렷이 지켜보았다. 내가 약 60년 전 고향 마당 평상에 누워 그 별자리를 본 이후로는 처음이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에 별똥별이 스쳐간다. 모처럼 체험하는 황홀경이다. 사실 내가 몽골여행을 택한 내면적 이유는 이곳 몽골 평원과 맞닿아 있는 밤하늘 별들의 향연을 맛보기 위함이었다.

마침 날씨가 쾌청하여 이틀 밤이나 계속해서 몽골 초원에서 밤하늘의 별들을 볼 수 있어, 내 평생 숨겨놓은 소원의 하나는 풀은 셈이다. 일찍이 임마누엘 칸트는 평생에 걸친 끊임없는 사색의 결과 순수이성비판철학을 정립했지만, 그에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신비로움은 두 가지였다고 한다. 그 하나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속에 선험적으로 내재하는 도덕률이라는 게다.

밤늦게 게르 안에 들어오니 난로에 장작불을 지펴 놓았다. 낮과 밤 기온차가 엄청 심해 밤에는 두꺼운 옷을 걸치고 있어야 할 정도다. 게르 안 일인용 침대 네 개가 각도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늦가을에 야영 온 기분으로 하룻밤을 보냈다. 날이 밝아 일어나 밖으로 나오니 이른 아침 초원은 너무 고즈넉했다. 집사람과 초원을 한참 거닐다가 완만한 언덕에 올라 돌무더기에 꽂힌 헝겊 깃발을 중심으로 세 바퀴를 돌았다. 어제 관람한 거대한 칭기스칸 청동기마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까이서 볼 때는 크기만 하고 좀 단조롭다 싶었는데 멀리서 보니 초원 한 가운데에 그 위용이 선명하게 잡힌다.

다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초원의 풀잎 끝에 맺힌 아침이슬이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비친다. 초원 위에 옅은 물보라가 덮인 것 같아 뭐라 형용하기 어려웠다. <금강경>에 일체 있는 바의 법(一切有爲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고 했다. 그리고는 또한 이슬(露)과 같다고 했다. 해서 인생은 초로(草露),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다는 게다. 이른 아침에 맺힌 '초로'는 아침나절이 지나면 금방 없어진다. 그래도 초원의 아침이슬처럼 '지금 이곳'의 우리 인생은 아름다운 게다. 다만 그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의 삶이 문제라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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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한국말을 가르쳐 준 손녀와 손자가 함께 서 있는 모습 아이들 표정이 맑으면서 진지하다. ⓒ 김병하


우리 일행이 이틀 동안 초원 게르에 머물고 있는 동안 개구쟁이 손자 경현이는 어느새 그곳 몽골인 아이들과 어울려 신나게 놀고 있다. 짓궃게도 일곱 살 박이 손자가 그곳 몽골아이들에게 겨우 가르쳐 준다는 말이 '똥'이라고 손녀가 일러준다. 하기야 '밥'이나 '똥'은 순수한 우리말이다. 그들보다 나이가 든 손녀는 몽골 아이들에게 '가위 바위 보'를 가르쳐 줬다고 한다. 이렇게 아이들은 만나면 금방 서로 잘 어울려 노는 게 참 신통하고 부럽다. 나중에 손자, 손녀에게는 이틀 동안 이곳 초원에서 몽골아이들과 과자도 나눠 먹으면서 함께 어울려 놀았다는 게 좋은 추억이 될 게다.

늦은 아침 식사 후 우리 일행은 테를지(Terelj)국립공원으로 이동했다. 국립공원 입구 콰이강 다리를 연상케 하는 낡은 목조 다리를 건너는 길에 수제로 만든 카우보이 모자를 하나 사서 썼다. 딸 태영이가 잘 어울린다고 치켜세워 주었다. 테를지의 바위산이 우리나라 소금강을 연상케 했다. 점심 식사 후 고풍스런 테를지 호텔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강물이 흐르는 숲과 푸른 하늘의 흰 구름을 보면서 여유 있는 휴식시간을 보냈다.

라운지 의자에 기대어 하늘을 쳐다보니 저만큼 높이 떠 있는 흰 구름을 등에 업고 검은 새 한 마리가 날고 있다. 그 새가 얼마나 높이 떠서 날고 있는지 구름을 지나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날 때는 그 형체가 보이질 않는다. 푸른 하늘 속에 새가 잠적해 버린듯했는가 싶더니 다시 흰 구름 속에 검은 새가 아련히 보인다. 아마 허공에 높이 홀로 유유자적하는 독수리 일 것으로 짐작된다.

다시 땅으로 눈길을 돌리니 호텔 뒤편 코너 잔디에 레닌 동상이 우뚝 서 있어서 어울리지 않는 듯했지만 인상적이었다. 이 나라가 약 70년간 소련의 지배를 받았다가 독립 된지 불과 20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하늘은 언제나처럼 평화로운데, 땅 위는 역사의 영욕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곳을 떠나 새벽사원으로 불려지는 '아리야발'(Aryapala)사원의 108계단을 오르면서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했다. 내가 계단을 오르면서 '옴마니반메훔'이라 염송하니 따라 오던 서양 젊은이도 연이어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했다. 이렇게 두 사람이 연이어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하는 사이에 어느 듯 사원 불상 앞에까지 다다랐다. 땀을 닦고 숨을 고르는 겸 사원 안에 자리를 잡아 잠시 몸과 맘을 쉬는 시간을 가졌다. 어느새 아들 태균이가 이제 내려가야 한다고 재촉한다.

여기 '옴마니반메훔'이라는 주문은 원래 뜻을 해석하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다라니는 그 뜻을 해석하길 "지혜와 함께하는 방편이자 방편과 함께하는 지혜"라 했다. '옴'은 수행자의 몸․말․마음을 상징하고, '마니'는 보석을, '반메'는 연꽃을 의미한다. 그리고 '훔'은 방편과 지혜가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를 이른다.

'옴마니반메훔'은 관세음보살의 여섯진언(六字眞言)으로 이는 불교 가르침의 정미(精米)에 해당된다. 이 '육자진언'을 염송하면 한량없는 지혜와 자비심을 얻게 되고, 금과 보배로써 무수한 불보살을 조성하고 공양하는 공덕보다 더 큰 공덕을 얻는다는 게다. 전자의 공덕은 눈에 보이는 양적인 공덕이지만, 후자의 공덕은 마음안의 질적인(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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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주년 광복절에 몽골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에서 태극기를 손에 든 필자 몽골 울란바타르에 있는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에서 72주년 광복절을 맞아 해방둥이인 필자가 태극기를 들고 서 있다. ⓒ 김병하


몽골여행의 마지막 날은 마침 광복 72주년을 맞는 8월 15일 광복절이었다. 우연찮게도 우리 일행은 이태준선생 기념공원에서 교민들이 주최하는 광복절 기념행사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태준(李泰俊; 1883-1921)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의형제를 맺은 분으로 몽골에서 의료봉사활동에 많은 공을 세웠기에 몽골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교민 대표가 대독하는 문재인 대통령 광복절 기념사에도 '이태준' 선생 이름이 호명될 정도였다. 햇빛이 강열해서 그늘진 곳에서 문대통령의 광복절 축사를 들어보니 내용이 좋았다. 특히 이 땅에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고, 한반도에서 전쟁을 기필코 방지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맘에 들었다.

해방둥이인 내게 몽골의 이태준지사 기념공원에서 맞는 광복 72주년은 또 다른 감회를 안겨준다. 광복(光復)이라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빛을 되찾은  감격의 날이 아니라, 민족분단이라는 비극의 날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72년이 지난 지금도 분단의 비극은 그 끝이 보이질 않는다. 어쩌면 내 생전에 통일까지는 아니어도 좋다. 우선 남북한 2국체제하에서 화해와 교류를 통한 평화 공존 만이라도 정착되는 날을 간절히 고대한다.

몽골여행  마지막 날 밤에 몽골전통 공연을 관람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몽골 유목미의 하루는 노래로 시작된다고 할 만큼 몽골 인들은 노래를 사랑한단다. 몽골의 전통공연단은 민요, 전통 악기, 전통 춤 등 각 분야의 예술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해금과 비슷한 현악기 '호치르'는 연주단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말 머리를 장식한 '머린 호르', 즉 '마두금'은 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악기다. 초원의 첼로라 불리는 이 악기의 연주를 들으면, 유난히 모성애가 부족한 낙타도 눈물을 흘리며 새끼에게 젖을 물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몽골 초원의 평화로움과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들의 향연을 뒤로 하고, 아쉬운 맘으로 몽골 울란바토르 공항을 떠나야 했다. 이렇게 4박 5일(8월12-16일) 간 우리 가족 일행의 몽골 여정은 무사히 그 막을 내렸다. 몽골이 고원지대여서 인지 손녀 지현(초등 6년)이는 마지막 날에 코피를 두 번이나 흘렸지만, 미운 일곱 살 손자 경현이의 개구쟁이 모습은 여전했다.
#몽골여행 #칭기스칸 #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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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로 태어나 지금은 명예교수로 그냥 읽고 쓰기와 산책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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