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시 선산출장소. 이 청사의 3층에 박정희대통령 기념재단이 위탁한 박정희 유품 5670점이 보관되어 있었다.
장호철
최근 한 일간지의 보도로 구미시청 선산출장소 3층에 보관되어 온 박정희 유품 5670의 일부가 드러났다. 2004년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으로부터 위탁 받은 지 14년 만에 4대의 폐회로 텔레비전이 출입문을 감시 중인 이 '비밀의 방'에서 확인된 유품은 맥을 빠지게 만든다(관련 기사 :
박정희 유품 5670점 보관해온 '비밀의방' 들여다보니…).
'비밀의 방'에는 '골동품만 가득하다'?기사에서 소개하고 있는 유품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다는 외국산 티파니 시계, 기어 자전거, 물소가죽 슬리퍼, 가죽 재질의 여행용 가방 세트, 삼성-산요 만든 초창기 TV, 박 전 대통령의 가죽소파, 육영수 여사가 앉은 노란 패브릭 소파 등이다.
미리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기사에서 확인하는 유품을 둘러보는 기분은 썰렁하기 이를 데 없다. 이미 새로운 물건에 익숙해진 눈에 비친 예의 유품들은 그게 설사 당대의 최고급품이라 하더라도 케케묵은 지난 시대의 유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유품'이라고 불리는 사물은 그것을 썼던 이들의 삶과 이어지긴 한다. 간디가 남긴 샌들과 찻잔, 회중시계와 안경 같은 물건들은 비록 볼품없이 낡은 것이지만 그의 무욕과 청빈의 삶을 상징하면서 거기 담긴 위대한 사랑과 사상을 증명한다.
작가가 남긴 만년필과 습작노트, 타이프라이터는 그의 문학을 상징하고 환기한다. 마찬가지로 화가의 붓과 물감, 화구 가방 따위는 그의 미술의, 작곡가의 오선지나 악보, 연주자의 피아노와 바이올린 같은 악기는 그의 음악의 상징이다.
사진가의 카메라, 등반가의 신발과 자일, 무용가의 토신, 지휘자의 지휘봉도 그렇다. 평범하게 살아갔던 이들의 삶도 그들의 유품으로 기억될 수 있다. 농부의 농기구, 어부의 배, 목수의 연장, 마부의 채찍은 그의 삶을 압축하고 있는 사물로서 그 주인의 생애를 유추하게 해 준다.
그러면 18년 동안 유례없는 권좌를 지키면서 종신 집권을 꿈꾸었던 독재자 박정희의 삶은 어떤 유품으로 기억될까. 아니, 인간의 삶과 사회에 가장 크고 깊은 영향을 미치는 게 정치일진대 정치가의 삶은 어떤 물건을 통해서 유추될 수 있을까.
인도의 지도자 간디는 앞서 든 검소한 삶의 표상으로서 기억되고, 영국의 처칠은 그의 전매특허 같은 시거를 통해서 떠올릴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그의 유품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가 살아생전에 선택하고 집행한 정책과 업적으로 기억된다.
미국의 대통령 기념관은 그의 생전 집무실을 재현하고 재임 기간 중 업적 중심으로 전시·구획하고 있다고 한다. 루즈벨트 대통령이라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뉴딜' 정책이고 케네디 대통령이라면 '뉴 프런티어' 같은 정책이 중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박정희는 찬반의 다툼이 있을 수 있지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나 '새마을운동', 또는 '조국 근대화'와 같은 정책과 이미지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를 기리는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서울), 박정희 민족중흥관이 이러한 정책과 이미지를 중심으로 꾸며져 있는 것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정치가는 '유품'이 아니라 '정책과 업적'으로 기억된다올 안에 완공될 면적 25만949㎡에 이르는 '새마을 테마 공원'은 주변의 생가, 민족중흥관 등과 어우러진 '박정희 타운'의 중심이다. 그리고 그것은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을 총합하면서 그에 대한 기림과 기억을 집대성하는 시설물이다.
이미 박정희를 기리고 기억하는 시설은 차고 넘치는 포화상태다. 열거한 시설물로도 박정희의 이미지와 정책은 충분히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선산출장소에 보관되어 온 박정희의 유품은 한 개인의 일상생활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어렵다는 얘기다.
구미시가 박정희 유물관을 60, 70년대 청와대의 일상을 재현하는 '시간여행'의 정거장으로 쓸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낡고 초라해 보이지만 공개된 유품들은 당대 최고 권력이 일상에서 쓰던 집기들이다. 굳이 다수 대중들의 고단했던 삶과 무관한 권좌의 호사를 엿보는 시설물에다 200억이라는 예산을 들이부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