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 보고타에서
김소연
재미가 없으면, 재미있게 만들어라고등학교 시절 한국무용을 전공한 김소연씨는 뒤늦게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세계적인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원대한 꿈을 가진 그에게 어머니는 "그러려면 우리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런 이유로 재수 끝에 사학과에 입학했지만 대학 생활은 재기발랄했던 그가 느끼기에 한없이 지루했다. 그러다 그의 푸념을 들은 선배의 "재미가 없으면 재미있게 만들어야지"라는 말 한마디가 소연씨의 학교 생활을 180도 바꿔 놓았다.
- 이것도 편견이지만 사학과는 소연씨 이미지와 잘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사학과가 너무 재미없었어요(웃음). 그러다 "직접 재미있게 만들어 보라"는 선배의 제안에 농활 대장을 맡았죠.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공연하고 같이 막걸리 마시고 춤추고 너무 재밌었어요. 근데 다음 농활에선 신청자가 없어서 사학과 농활대를 없앤다는 거예요. 제가 사람들 설득해서 15명을 모았어요. 학과 공부보다는 이렇게 사람들 모아서 노는 게 재밌었어요."
- 대학 2학년 때 어학연수를 갔는데, 미국 마이애미로 간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스무 살 조금 넘어서 처음으로 외국을 갔어요. 엄마랑 간 베트남, 캄보디아였는데요. 그때 베트남 전통의상인 '아오자이'를 입고 다녔는데, 인기가 정말 많았어요. 제가 외국에서 통한다는 걸 알게 됐죠(웃음). 그 후로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브라질 삼바 축제도 가고 인도도 가고요.
마이애미로 간 이유는, 영화 보면 마이애미에 섹시한 사람들도 많고 범죄도 많잖아요.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가야 할 것 같다는 '필(Feel)'이 빡! 왔죠. 결과적으로 마이애미에서 지냈던 시간이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 한국에서 어학연수로 많이 가는 곳은 아닌데 그곳 생활은 어땠어요?"영어를 잘 못하지만 외국에선 어떻게든 다 혼자 처리해야 하잖아요. 집에 전기가 끊기면 직접 가서 해결하고. 그렇게 살다 보니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또 제가 가슴이 약간 큰 데 그게 한국에서는 콤플렉스였어요. 시선도 불편하고 버스 같은 데서 치한도 많았어요. 근데 마이애미에선 "너 참 예쁘다"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고 이상한 시선도 많지 않아 편했죠.
생활은... 맨날 파티 다니고 친구들이랑 어울렸어요. 7개월 동안 너무 놀아서 남은 3개월은 텍사스에 있는 기독교 대학의 부설 어학원으로 옮겼어요. 근데 그동안 너무 놀아서 공부가 안되는 거예요. 1달 정도 있다가 '여행이나 해야겠다' 생각하고 여행을 떠났죠. 1년 동안 열심히 놀다 보니까 영어는 진짜 많이 늘더라고요."
- 어학연수를 갔는데 어학원을 그만두고 여행을 간 거네요?"어학원을 그만두면 비자가 사라져서 미등록 체류자(일명 불법체류자)가 돼요. 학원에 그만두겠다고 얘기했더니 "너 나중에 미국으로 신혼여행 오고 싶지 않아?" 그러더라고요. 나중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거죠. 근데 전 그냥 "바이(Bye)"하고 나왔어요. 나중에 학생비자가 만료됐다고 이메일이 왔어요.
마이애미에서 만난 한국 친구의 차를 타고 한 달 정도 뉴욕, 시카고, 덴버, 샌디에이고로 미국 횡단 여행을 했어요. 돈 아낀다고 길가에 차 세워두고 자기도 했고요. 몇 년 후에 (취직해서) 라스베이거스로 출장 갔는데 입국할 때 아무 일도 안 생기더라고요."
▲미국 여행 중
김소연
불꽃처럼 뜨거웠던 20대의 마지막미국 어학연수, 아니 미국 횡단 여행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소연씨는 더욱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취업은 그리 쉽지 않았다. 여러 회사에 지원했지만 결과는 생각과 달리 매번 낙방이었다. 능숙했던 영어는 미국 파티에서는 빛났지만 한국 취업의 문턱을 넘기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서울 세계 불꽃축제'를 운영하는 광고회사 한컴의 채용공고를 보게 됐고, 그곳에서 승부를 보기로 결심했다.
- 예전부터 축제 기획에 관심이 있으셨나요?"농활 이후 학회실에 '레드카펫'을 깔고 크리스마스 축제도 열었어요. 사람들이 내가 만든 축제의 장에서 열광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해외 축제도 많이 다니고, 홍대 페스티벌 같은 곳에서 자원 활동도 몇 번 했고요.
한국은 브라질 삼바 축제처럼 모두 모여서 춤추는 축제는 없잖아요. '내가 죽기 전에 우리나라 역사에 남을 축제를 하나 만들어야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한컴에서 불꽃축제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미 그런 축제를 하는 회사라면 내가 다른 것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불꽃축제면 원하던 자리에 맞게 입사하셨네요."채용 공고를 보니 마감이 다음 날 오후 3시였어요. 일단 노트북과 엄마 신용카드를 가지고 모텔에 들어갔죠. 밤새 이력서 써서 마감시간에 딱 보냈어요. 근데 제가 원하던 프로모션 쪽이 아니라 광고 AE(기획자)만 뽑고 있었어요. 그래도 '일단 AE라도 돼보자'는 생각이었죠. 입사원서를 내놓고 태국 송끄란 물축제에 갔는데 합격 통보가 왔어요. 한국 돌아온 날 배낭 메고, 슬리퍼 신은 채 인적성 시험을 보러 갔죠. 그런데 그것도 붙은 거예요!
출근 첫날, 상사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가 논의를 해 봤는데 소연씨는 AE로 붙었지만 BTL(프로모션 분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프로모션 쪽에서 능력을 발굴시키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게 사장님과 임원 전체의 의견이에요" 저는 바로 "감사합니다" 했죠! 속으로 '어떻게 이런 기적이 있나' 했어요."
- 회사생활은 어땠어요?"BTL은 여러 업체를 관리하고, 발주하는 곳이라 신입을 잘 안 뽑아요. 보통 경력직을 뽑죠. 제가 6년인가 만에 뽑힌 신입이었어요. 그래서 다들 많이 예뻐해 주셨어요. 근데 제 팀장님만 '죽든 말든 알아서 하라'며 일을 엄청 심하게 시켰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강하게 키우고 싶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분이 불꽃축제 주 담당자고 제가 '서포트'였어요. 2012년부터 그걸 4년 동안 했어요. '정말 내 꿈이 이루어지는구나' 생각하고 밤새도록 일하고, 아이디어도 짜고 재밌게 일했었죠."
▲불꽃축제의 현장
김소연
- 재미있는 일 찾기가 쉽지 않은데, 원하는 일을 하다가 퇴사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제가 회사 들어갔을 때가 26살(이하 모두 한국 나이로)이었어요. 근데 영어 프레젠테이션을 해서 예산 10억 원이 넘는 경쟁 PT를 딴 거예요. 회사에서 '굉장한 애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인정받으니 즐거웠어요. 근데 몇 년이 지나고 서른을 앞두니까, '30'이라는 나이가 너무 무서웠어요. 이젠 사회에 굴복해야 하는 나이랄까. 20대는 뛰어다니고 좌충우돌 부딪히고 누구와 연애를 해도 상관없는데, 서른이 되면 회사에 헌신하고 아이를 가져야 할 것 같은 거예요.
불꽃축제도 자리 잡혀가고 좋았는데 그게 한편으로 무서웠어요. 광고업계에 있으니까 인생이 벅차게도 바쁘더라고요. 엊그제 입사한 것 같은데 눈 떠보니 이미 1년이 지나있고,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다 보니 또 1년이 지나가고.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 인생은 이게 끝이 아닌 거 같은데, 내 인생의 모험은 끝난 거 같지 않은데…' 대기업 직장에 남자 친구도 있고 돈도 괜찮게 벌고 있으니, 이러다가 결혼해서 애 낳고 평생 이렇게 살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겼어요.
'익숙한 생활에 빠져들 것인가 아니면 뺄 것인가' 계속 고민했죠. 그러다 29살로 넘어갈 때 라스베이거스에서 2015년 새해를 맞았어요. 외국 불꽃축제를 보고 우리 축제의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출장이었죠. 아이러니하게도 그 출장에서 회사를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라스베이거스 기념품 가게에서 열쇠고리를 보는데, 이 출장이 다 회사를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앞날이 깜깜하더라고요. '분명히 세상엔 너무나도 즐겁고 무궁무진한 기회가 있을 텐데'라는 기대감과 아쉬움도 컸고요. 그래서 '나를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야지. 회사를 그만두고 외국에 나가서 마지막으로 정말 막연한 생모험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만나게 될지, 무엇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1년만 모든 걸 내려놓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보고 싶었어요. 사실 이렇다 할 목표가 없어서 두려움은 컸지만, 안 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제 인생을 건 도박을 해보자고 결심했어요."
▲소연씨가 준비했던 서울 세계 불꽃축제
김소연
- 라스베이거스 출장에서 돌아온 후 바로 퇴사 준비를 하신 건가요?"아니오. 부모님이 (주변에) 제 자랑을 많이 하시고, 남자 친구와 헤어지는 것도 걱정되고 이것저것 걸리는 게 많았어요. 대리 진급도 얼마 안 남고, 연봉도 나쁘지 않아서 더 오래 걸렸죠. 가진 게 많으니까 놓기가 힘든 거예요. 그렇게 8개월을 더 고민했죠.
그때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중요한 거 하나만 선택해. 가지는 쳐내면 되는 거야" 그때 '(미래에) 덜 후회할 걸 하자'고 결심했어요. 일은 평생 할 수 있지만, 다른 나라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살면서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보는 건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남들이 미쳤다고 해도 30살이 조금 넘은 나이에 직장, 돈, 남자 친구가 없는 것뿐이잖아요. 조금 무섭기야 하겠지만 다시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도 아니고요. 결국 8개월 후 2015년 여름에 회사에 얘기했어요. 10월 불꽃축제 끝내면서 퇴사하고, 2주 만에 출국했어요."
- 부모님에게는 뭐라고 말씀드렸어요?"아빠는 대학생 때 어학연수도 반대하셨어요. 9장짜리 기획안을 만들어서 부모님한테 프레젠테이션하며 설득했는데도, 미국으로 떠날 때 아빠 얼굴도 보지 못했어요. 근데 이번엔 둘이 소주 3병, 맥주 8병, 막걸리 1병을 해치우고 속을 게워내며 말씀드렸어요. 그때 아빠가 말씀하신 게 가슴에 남아 있어요.
'그래, 잘 생각했다 아빠가 살아보니 아등바등 앞만 보고 달려온 게 후회스럽다. 더 젊고 열정이 있을 때 많은 걸 해봐. 아빤 언제나 널 응원하는 버팀목이고 보디가드다. 잘 다녀와.'"
▲산에서 바라본 콜롬비아 칼리 시내. 미국 드라마 나르코스 시즌3의 배경이다.
김병철
'살사 비자'로 시작한 콜롬비아 생활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으니, 이제 살아볼 곳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 콜롬비아에 있는 '살사의 도시' 칼리(Cali)를 알게 됐다. 한국무용을 했던 소연씨에게 춤은 인생의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다. 주저 없이 선택한 칼리는 그에게 또 다른 기회를 줬다. '한번 살아보러 간 곳'에서 사업과 해외취업 그리고 '국제 연애'라는 큰 모험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모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왜 남미를 선택하신 거예요? 그것도 콜롬비아로요."마이애미에 있을 때 '남미 사람 같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회사 다닐 때도 아버지가 브라질 사람이라는 얘기가 돌기도 했어요. '그러면 내 조국을 한번 찾아가 볼까'하는 생각을 했죠. 남미에 대한 갈망이 있었어요. 브라질에서 삼바를 췄을 때도 늙기 전에 자유롭게 남미에서 살고 싶기도 했고요.
퇴사하고 정말 갈 수 있게 됐을 때 남미 어디로 갈지 고민했죠. 원 없이 춤추고 싶었어요. 남미는 춤이잖아요! 아르헨티나? 브라질? 삼바를 뜨겁게 춰야 하나? 마이애미에 같이 있던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칼리*가 살사의 도시고, 날씨도 너무 좋다는 거예요. 그래서 별로 찾아보지도 않고 비행기표를 샀어요."
칼리(Cali) |
보고타(수도), 메데인에 이은 콜롬비아 제3의 도시로 콜롬비아 서부에 있다. 관광거리는 많지 않으나 살사 학원과 클럽 문화가 세계 각지의 여행자를 끌어들인다. |
- 나 홀로 남미의 도시에 떨어진 건데, 칼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드디어 나의 섹시함을 꽃피울 수 있는 남미구나' 하면서 왔죠(웃음). 사실 걱정도 조금 됐어요. 오는 비행기에서 '내가 정말 지금 뭐 하는 거지? 이래도 되는 건가' 스스로 혼란스럽기도 하고 엄마가 외교부 사이트에서 (여행경보제도를) 확인했는데 인도도 주황색인데 콜롬비아 칼리는 빨간색이라는 거예요. 칼리를 추천한 콜롬비아 친구를 공항에서 만나자마자 진짜 위험한지 물어봤죠. 아니라고 답하길 기대했는데 "길에서 휴대폰이나 돈을 꺼내면 절대 안 돼. 위험해" 이런 얘기를 들으니 도착하자마자 기분이 안 좋았어요.
일단은 여행자들이 모이는 산 안토니오 지역의 호스텔로 갔어요. 그 친구는 데려다주고 바로 가버렸고요. 남미에 오면 길에서 다 춤추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인사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 모든 집에 철창이 처져 있는 거예요. 보통 호스텔 주인이 여행 정보를 알려주는데 마침 주인도 없어서 엄청 우울했어요. 2, 3일 동안 친구도 없이 혼자 맥주나 마시면서 방에 갇혀 있었어요. 그러다 4일째 되는 날 마음을 먹고 길을 나섰죠.
사람들한테 "아까데미 살사(살사 학교)?"라고 물어보면서 다녔어요. 겨우 하나 찾아갔는데 문이 닫혔더라고요.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다녀서 '망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살사 음악이 들리는 거예요. 혹시나 해서 건물로 들어가 보니 살사 학교였어요.
마침 숙박업도 같이 하는 곳이라 바로 등록하고 방도 옮겼어요. 살사가 저랑 잘 맞더라고요. 점점 실력이 늘다 보니 '정식 기관에서 제대로 배워서 동양인 최초로 살사를 정복한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