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개인소장, 설명: 단원 김홍도의 단원도, 왼쪽의 거문고 연주하는 자가 단원, 가운데 부채를 든 자가 강희언, 오른쪽에 수염을 기른 사람이 정란. 오른쪽 하단부분에 정란을 모시는 사내종과 청노새가 보인다.
개인소장본
전문여행가로 살아가는 삶은 분명 해볼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 누구도 시도해 보지 못한 삶,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컸다. 정란은 서른나던 해부터 20년간 조선팔도 구석구석을 그야말로 '뻔질나게' 돌아다녔다.
남쪽으로는 낙동강, 덕유산, 속리산, 월출산, 지리산을 동쪽으로는 태백산, 소백산, 금강산을 올랐다.
산사나이가 여기에 만족할 리가 없다.
쉰살 무렵엔 백두산과 한라산을 오르기로 결심한다. 백두산은 오지에다가 험하기가 이루말할 수 없어서 토착인들도 어려워했던 산이었다. 한라산은 수륙 일천리를 달려가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그야말로 신선들이 살던 산이다.
그런 그가 백두산을 오르고 1785년에는 한라산에 올라 마지막 대업을 완성했다. 그리고 당대의 인기인이 되었다.
18세기 조선에선 명산을 등반하는 열풍이 불었다. 행세깨나 한다는 양반 사대부들은 악공, 기생, 숙수들을 거나하게 대동하고 중들이 맨 교자를 타고 금강산에 올랐다. 그야말로 귀족들의 사치스런 풍류였으리라.
이런 여행길을 정란은 청노새 한마리와 종 하나만을 대동하고 나선 것이다. 그에게 여행이란 어떤 의미였을까? 그저 인생을 즐긴 '욜로' 인생이었을까? 아니면 현실을 외면한 '폐인'이었을까?
그의 열정적인 일생에도 그림자는 있었다.
처자식을 외면한 그였기에 집안 돌보는 일은 온전히 그의 아들 몫이었다. 방랑벽에 빠진 아버지를 기다리다, 외동 아들은 18살에 요절하고 만다. 아내와 과부가 된 며느리 역시 그를 기다리다 눈물 속에 세월을 보냈다.
오죽했으면 그의 사돈이자 같은 남인인 조술도가 정란에게 편지를 써 꾸짖었을까? 그는 그렇게 세간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성리학이 지배하던 18세기 조선시대. 그 틈새를 파고들어 등장한 이 어리숙하고 부족한 인물이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각광을 받았던 시대가 또 18세기 조선이었다.
오늘날 '내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 라는 욜로(YOLO) 인생에 긍정과 부정이 혼재하듯이, 18세기 당시 실존했던 프로 여행꾼 정란에 대한 칭찬와 비난이 공존하는 것 역시, 우리가 음미해 볼만한 일이다.
(
지난편 보기: [역사 카툰] 남편 필요없어! 조선 '걸크러쉬' 김호연재)
[참고문헌: 조선의 프로페셔녈 (안대회 著), 벽광나치오 (안대회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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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카툰] 조선시대 욜로 원조, '정란'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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