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은행나무가 입구를 지키는 임고서원. 가을이면 아름다운 풍광까지 사람들에게 선물한다.
경북매일 자료사진
그렇다면 이 서원들이 필요로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충절을 지킨 동시에 학문적 성취까지 이룬 선현'이었다. 그러한 상징적 인물을 서원의 중심에 세움으로써 국가에 충성을 다하고 부모에게는 효를 행하며 유교의 경전(經典)을 연구하는 지역의 젊은 인재들을 키우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포은 정몽주는 서원의 정신적 지주가 되기에 충분한 사람이다. 자신의 왕을 배신하지 않았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심을 보였으며, 성리학의 핵심을 꿰뚫고 있던 인물이 바로 포은.
정몽주를 추모하고 학문적 업적을 이어가기 위한 목적에서 세워진 것이 바로 영천의 임고서원이다. 조선의 13대 왕인 명종은 임고서원에 수많은 책과 함께 편액(종이나 나무판 위에 글씨를 쓴 액자)을 내렸다.
조선의 왕이 직접 쓴 글씨가 걸린 서원은 특별히 사액서원(賜額書院)이라 불린다. 당시 임고서원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영천 충효문화수련원 김명환 원장이다.
"임진왜란 때 임고서원이 불에 타 무너졌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선조(조선 14대 왕)가 지금의 위치로 서원을 옮겨 지었죠. 1603년의 일입니다. 그때 선조는 다시 한 번 편액을 내림으로써 임고서원의 지위를 높여주었다고 합니다."두 명의 임금이 편액을 하사한 사실만 봐도 임고서원과 정몽주가 지닌 당대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취재를 위해 임고서원을 찾았던 날.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것은 '임고서원 은행나무'였다. 경상북도 기념물 63호인 이 나무는 높이가 20m에 이르는 거목이다. 수령이 500년이 넘었다는 은행나무의 당당한 기품이 포은의 높았던 기상을 자연스레 떠오르게 했다. 또한, 단풍으로 물든 가을날의 임고서원 풍광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포은문집>과 <지봉유설>, 포은 영정 등 만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