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군국주의의 상징인 전범기(욱일기)
김경준
어느덧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이 밝았다. 이날 밤엔 특별한 시간이 마련됐다. 귀국을 앞두고 모두가 한 자리에 모여 탐방 소감을 발표했던 것이다. 학생들은 짧았던 탐방 기간 각자 인상 깊었던 지역이나 역사적 사실에 대해 발표했다.
학교, 지역, 나이, 성별 등 다양한 면면만큼이나 학생들이 느낀 바도 다양했다. 학생들은 "윤봉길 의사 순국기념비 앞에서 다 함께 애국가를 부를 때 뿌듯했다", "일본의 현역 정치인이 과거 자신들의 조상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사죄했을 때 울컥했다", "일본인들에게 우리가 겪은 아픈 역사를 잘 전달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는 등의 소감을 밝혔다.
그중에서도 이산하(국민대 한국역사학과 3)군의 발표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산하군은 "솔직히 역사를 전공하고 있지만 그동안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다"며 "윤봉길 의사에 대해서도 그냥 중국 어딘가에서 돌아가셨을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을 뿐, 설마 일본까지 와서 돌아가셨을 줄은 몰랐다"고 고백해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여기 함께 답사 온 친구들 모두 언젠가 교사가 되거나 학자가 되어 강단에 서게 될 텐데 우리가 이번에 배운 사실들을 널리 알려달라"며 "나 역시 내가 처한 위치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러한 사실들을 전파하겠다"고 당부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윽고 내가 속한 조가 발표할 시간이 됐다. 우리 조는 나의 제안에 따라 야스쿠니에서 촬영했던 '전범기(욱일기)' 사진을 대형 슬라이드 화면에 띄웠다. 난데없이 등장한 전범기 사진에 모두 의아한 눈치였다. 마이크를 잡은 조장 전승지양(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4)양이 전범기를 띄운 까닭을 대신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날 우리가 전달하고자 했던 키워드는 바로 '반면교사'였다. 전범기는 과거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었고 지금은 자신들의 역사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점점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 우익세력을 대변하는 깃발이다. 우리는 과거로 회귀하려는 일본의 반역사적인 태도에 대해 비판하는 동시에 우리 역시 그러한 과오를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자는 취지로 전범기를 띄웠던 것이다.
오랜 시간 우리는 일본의 무책임한 역사의식에 대해 비판하며 사죄를 촉구해왔으나, 과연 우리 자신도 떳떳하게 '과거사 청산'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일본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면서도 정작 6·25 전쟁 당시 운용됐던 '한국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 침묵을 지켜왔다. 어쩌면 일부러 외면해왔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명분 없는 베트남전쟁 참전에 대한 끊임없는 정당화 시도,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폄하 시도 그리고 여전히 국립현충원에 잠들어있는 친일부역자들 문제까지. 과연 우리는 우리 스스로 과거사 청산을 떳떳하게 끝마쳤노라 주장할 수 있는가.
그래서 전범기는 우리를 돌아볼 수 있는 반면교사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일본에 대해 역사적 책임을 묻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역시 우리 안의 또 다른 '전범기'를 인식하고 그에 대해 자성하는 태도를 가져야만 할 것이다.
이렇듯 학생들은 서로가 발표한 생각에 대해 박수로 화답하기도 하고 의문을 제시하기도 하며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 채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도쿄에서의 마지막 밤은 학생들의 뜨거운 토론 열기로 저물어가고 있었다.
(* 6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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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전공 박사과정 대학원생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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