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9일 전남 여수에서 개최된 백무현 화백 북 콘서트. 이날 기자는 사회를 봤다.
고상만
한편 그날 함께한 이들은 콘서트를 통해 형님의 진심을 알았고 그 진심이 귀한 결실로 맺어지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렇게 되리라 확신했습니다. 이를 위해 형님이 얼마나 애를 썼는지는 훗날 개봉된 다큐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에서 잘 드러나 있으니 어찌 모를까요.
그래서 형님이 떠나고 난 후 공개된 다큐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는 제 가슴을 내내 아프게 했습니다. 선거 운동이 시작된 후 종종 형님에게 응원과 지지를 겸한 문자를 보냈지요. 승리를 기원하며, 그리하여 다가올 대선에서 형님이 큰 역할을 하도록 응원하고 싶었으나 고작 그것 밖에 못하여 늘 미안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비극이 형님을 노크하고 있음을 알게된 때 말입니다. 그 당시 너무 많이 살이 빠져 이상하다 싶었으나 별 일이야 있을까 싶었는데 그 비극이 끝내 형님의 전부를 삼킬 줄 누가 알았을까요.
백무현 후보, 위암 말기에도 끝까지 완주하다때는 선거전이 뜨겁게 달아오르던 2016년 3월 말, 본격적인 선거 운동을 앞두고 별 생각없이 병원에 들렀다는 형님. 처음 나간 선거에서, 그리고 이를 위해 공천을 받는 과정에서 받게된 스트레스로 몸이 좀 힘들었나 싶었는데 결과는 너무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위암 말기 진단.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에 가장 놀란 이는 다름아닌 형님의 처남이셨지요. 형님을 수행하여 들른 병원에서 당사자가 아닌 처남에게만 그 결과를 알려줬고 처남은 고민 끝에 형님에게도, 그리고 누나에게도 이 사실을 전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미 병이 깊어져 치료 시기도 놓친 상황에서, 그래서 할 수 있는 치유 방법이 아무것도 없는 그때, 처남은 울며 모진 마음을 먹었다고 훗날 술회했지요. 돌아갈 길이 없는 그때 매형이 그토록 하고 싶었던 도전이라도 원없이 하고 가시는 것이 그나마 한이 없을 것 같다는 뜻이었지요.
그리고 이어진 선거 운동. 형님은 정말 후회없이 최선을 다 하셨습니다. 위암 말기의 몸으로 여수의 곳곳을 누비며 사람을 만나고 그 분들에게 왜 지금 정치 혁신이 필요한지에 대해 사자후를 외쳤습니다.
하지만 몸은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날로 체력은 떨어지고 선거운동을 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진 것입니다. 더욱 가파르게 몸은 야위어 갔고 병원을 찾는 시간도 더 빨라졌습니다. 정치 신인이 넘어야 할 벽은 한없이 높은데 유세조차 쉽지 않은 몸으로 어찌 가능할 일일까요.
하지만 형님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몸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는 어렴풋하게 알았지만 자신과 유권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지요. 특히 2016년 4월 11일, 막바지 선거 유세로 치닫던 그날 문재인 전 대표가 여수를 방문하여 형님과 합동 유세 하던 날 기억나시지요. 그날 형님은 문 전 대표와 함께 두 손을 치켜들며 당당한 승리를 약속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함께 환호하며 진심으로 승리를 기원했지요. 하지만 세상 일은 참으로 얄궂었습니다. 4월 13일, 형님은 한꺼번에 두 가지 슬픈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끝내 구태 정치의 벽을 무너뜨리는데 실패했다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이 말기 암을 앓고 있다는 점. 바로 그 사연과 과정을 담은 다큐 영화 '무현, 두 도시 이야기'가 훗날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이유였습니다.
형님이 남긴 마지막 카툰, '나는 산다'방송을 통해 형님의 패배를 알게 된 후 저는 상심에 빠진 형님을 생각하며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지인에게 전화를 돌리던 그때, 저는 그제야 뒤늦게 형님의 병세 소식을 접했습니다. 무엇으로 그 충격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넉달 여가 지나가던 그 해 8월 15일. 한 통의 부고 소식이 제 휴대폰으로 전해졌습니다.
'고 반장. 백 화백이 소천하셨답니다.'
아. 그 슬픔을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그래서 달려간 빈소에서 저는 형님의 영정을 보며 다시 또 울었습니다. 예의 그 환한 미소를 보며, 그리고 못 다한 형님의 열정과 꿈이 안타까워서 또 울었습니다. 더불어 원대하게 시작한 『만화 노무현』의 두 번째 책을 내지도 못한 채 떠난 형님을 생각하며 또 울었습니다.
그래서 평소 가까웠던 지인 분들과 앉아 형님의 빈소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침묵이 이어지던 때 저는 정말 깜짝 놀랄 만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기무형문화재 제20호인 임웅수 형님께서 제게 전해 주신 사연 말입니다.
"고 반장. 내가 할 말이 있소. 사실은 얼마 전 백 화백이 내게 꼭 전할 말이 있다며 병원에 와달라고 하여 찾아 간 적이 있었소. 그런데 그때 여러 말 끝에 잠시 화장실을 간다며 병실을 비운 적이 있는데 그때 우연히 책상에 놓은 연습장을 보게 된 거요. 그 그림을 내가 잊을 수가 없소."
그림? 생전 화백으로, 그리고 시사만화가로서 일생을 그림만 그리며 살아온 형님이 남긴 마지막 그림이라니. 저는 도대체 무엇일까 싶어 그림을 볼 수 있냐며 채근했습니다. 그러자 임웅수 형님은 '마침 그때 내가 휴대폰으로 그 그림을 촬영했다'며 휴대폰을 꺼내 찾기 시작했지요.
그렇게 해서 보게된 '형님의 마지막 그림'. 그리고 순간 전해진 전율. '살아야겠다는' 형님의 무섭고도 강한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 그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