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광화열사묘지(墓誌)진광화 열사에 대한 이력과 삶과 죽음과 추모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묘지(墓誌)는 묘에 대한 간단한 기록이다. 스먼촌 초장지의 묘지를 그대로 옮긴 듯하다. 한문은 간자체가 아니라 번자체이고 연호도 중화민국31년으로 쓰고 있다.
박청용
번역이 제대로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일제시대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젊음과 열정을 다 다했던 대한 청년의 치열한 삶이 전해져 왔다. 빼앗긴 조국에 태어난 젊은이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진광화 열사는 시대적 정신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중학교 시절부터 일제에 항거하고 동맹휴학을 주도하는 등 활동을 했다.
일제의 탄압에 못 견딘 젊은이는 묘지석에 기록된 것처럼 반일의 열정을 갖고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 대학을 다니면서도 조선청년을 모으고 중국인들과 함께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조선인을 모아서 교육하고 중국 혁명가들과 함께 힘을 합쳐서 항일운동에 매진했다. 이역만리에서 조국을 되찾겠다고 동분서주하다가 영양실조에 걸리고 몸이 수척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용군에 들어가 불꽃같이 싸워나갔다.
1942년 5월에 3만 명의 일제 정규군이 태항산에 근거지를 둔 팔로군을 포위공격을 했다. 일제의 소탕에 맞서 반소탕전을 벌이던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은 포위망 돌파 작전을 전개하고 작전은 성공했다. 이때 팽덕회, 등소평등 쟁쟁한 혁명 전사들과 비무장 대원들까지 탈출했다.
조선의용군은 적을 유인하고 동지들을 살리느라고 진광화 동지는 31세에, 윤세주 동지는 42세의 나이로 태항산맥 자락에서 숨졌다. 이때 팔로군의 좌권 장군도 숨졌다. 반소탕전이 끝나고 중국인들 수천명이 모여서 좌권, 윤세주, 진광화 동지를 위해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르면서 태항산맥 연화산 자락에 묘지를 조성했다.
중국인들이 감동하고 팔로군들이 인정한 조선의용군들이었다. 이들이 일제의 포위망을 뚫었기에 중국혁명가의 주요 지도부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특히 등소평이 살아남아서 마오쩌둥 이후에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끌고 부강한 중국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오늘의 발전된 중국을 있게 한 것은 함께 공동의 적을 물리치고 함께 피를 흘린 조선의용군들이 있음을 중국인들도 알 만한 사람들은 인정할 것이다.
31세의 나이면 정말 아깝다. 42세의 윤세주도 너무나 아깝다. 이분들이 살아서 해방정국에 무장된 조선의용군과 함께 조국에 들어왔다면 우리의 현대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젊은 혁명 열사들을 생각하면서 아쉬움이 가득했다.
윤세주 묘소를 찾아서좌권 장군 묘소 옆에 있는 진광화 묘소는 쉽게 찾았는데 윤세주 열사의 묘소는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그 넒은 진기로예 열사능원을 땀 흘리면서 한 바퀴를 다 돌면서 꼼꼼히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일반 병사들이 묻힌 묘소들이 있다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언어가 잘 안 통하니 누구에게 물어 볼 수도 없고 난감했다.
땀을 뻘뻘 흘리었다. 배낭의 무게가 점점 조여 왔다. 처음에 들어왔던 남쪽 문이었는데 못보고 그냥 지나쳤는가 하면서 다시 둘러보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안 보였다. 온 몸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다리의 힘도 풀리고 마음도 지쳤다. 포기할까 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다시 차근차근 찾아볼 요량으로 남문으로 나왔다.
남문 앞에서는 차와 오토바이와 자전거들이 싱싱 달리는 왕복 4차선 도로였다. 그런데 그 길 건너에 공원 같은 것이 또 하나 보였다. 공원이 크고 넓어서 진기로예 능원은 하나라고 생각한 것이 나의 착각이었다. 길 남쪽에 또 하나의 능원이 조성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길을 건너서 달려갔다. 사람들이 쉬고 있는 나무들 사이를 지나니 묘지들이 나란히 정리 된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