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출을 바라보고 있는 김천일 동상
정만진
김천일, 최원, 우성전, 경기 수사 이빈, 충청 수사 변양준 연합군은 8월 2일 한강 북안 양화나루 일대의 왜군을 공격하여 200여 적병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장단, 화장포, 김포 등지에서는 패하기도 하고,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기도 했다.
1593년 1월 8일 명나라 지원군과 조선 연합군이 평양성을 수복했다. 2월 12일 권율 도원수 지휘의 행주산성 전투를 외곽에서 지원한 김천일은 57세의 고령에 병까지 앓고 있는 형편이었지만 4월 10일 이후 한양을 버리고 경상도로 남하한 일본군을 추격하여 경남 함안까지 내려갔다.
도요토미의 보복심으로 시작된 진주성 싸움2차 진주성 싸움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2차 진주성 싸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보복심 때문에 빚어진 전투였다. 여기서 보복심은 1차 진주성 싸움에서 대패를 한 데 대한 앙갚음 심리를 말한다.
1차 진주성 싸움은 1592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벌어졌다. 진주 목사 김시민을 비롯한 조선의 군·관·민은 3,000여 명에 불과했지만 결사항전 끝에 3만 명에 이르는 대적을 격파했다. 그 탓에 일본군은 곡창 지대인 호남에 들어가지 못했고, 군량미를 공급받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었다. 굶주림, 추위, 조선 수군, 의병, 명나라 지원군 등이 일본군 패퇴의 원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진주성 대패에 대한 보복심은 예상할 만한 일이었다.
▲정열사 : 김천일 사당
정만진
1593년 6월 19일, 작년의 1차 진주성 싸움 패전이 전쟁 전체의 판세에 결정적 악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0만 명이 넘는 일본군을 진주로 보냈다. 진작부터 공개적으로 전군을 동원해 보복전을 치르겠다고 선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 점령 후)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모두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적군 10만과 아군 6,000명의 혈투…. 전투가 성립될 수 없는 규모의 차이였다. 진주성 안 촉석정충단비의 안내판은 '보복전을 시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특명을 내려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왜군 최정예의 대군을 편성, 2차로 진주성을 공격해왔다. 이때 삼장사(三壯士)를 중심으로 뭉친 진주성의 군·관·민은 압도적인 적세에 두려움 없이 맞서 전원이 순국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진주성 내 촉석정충단비의 내용 |
이 비는 조선 선조 26년(1593) 6월 19일∼29일 사이에 있었던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삼장사 김천일, 황진, 최경희 및 군·관·민의 영령을 제사하기 위하여 세운 정충단의 비석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적의 기습적 공격에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우리는 한동안 육지의 전투에서 곤경에 처했었다. 그러나 우리의 군대가 흐트러진 대오를 가다듬기 시작하면서 왜적을 제압하자, 수세에 몰린 적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아군의 10배에 가까운 병력으로 일대 반격을 펼쳤으나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하여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제1차 진주성 싸움(1592년 10월 5일∼10일)이다.
그들은 이에 대한 보복전을 시도, 풍신수길의 특명에 의해 가등청정, 소서행장 등이 이끄는 왜군 최정예의 대군을 편성하여 2차로 진주성을 공격해왔다. 이때 삼장사를 중심으로 뭉친 진주성의 군관민은 압도적인 적세에 두려움 없이 맞서 전원이 순국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숙종 12년(1686)에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이들을 위해 촉석루 동쪽에 정충단을 세웠다.
|
10만 대 6천의 대결너무나 '압도적인 적세'였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6월 19일 전투가 개시된 이래 6월 29일까지 11일 동안이나 함락당하지 않고 대항해 싸웠다는 사실 자체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전원이 순국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고 적들과 싸우다 삶을 마친 선조들의 의기 앞에 오로지 숙연해질 뿐이다.
촉석루는 김천일, 김천일의 아들 김상건, 최경회,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 2차 진주성 싸움 중 전사한 강희보의 동생 강희열, 성수경 등 최후까지 분전한 장졸들이 스스로 몸을 남강에 떨어뜨려 목숨을 버린 곳이다. 논개도 이곳에서 왜장을 유인한 후 마침내 남강 시퍼런 물길 속으로 가냘픈 목숨을 던졌다.
적은 '창고에 들어가 있으면 안전하다'면서 성내에 남아 있던 백성들을 속여 사람들이 그 안에 모이자 모두 불태워 죽였다. 적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닭과 개까지 살아있는 생명체는 모두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