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충사 사당 뒤편에는 이대원과 정운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진은 정운 동상이다.
정만진
이대원은 1587년(선조 20) 녹도 만호로서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적을 맞아 전과를 올렸고, 손죽도 해상에서 순절한 인물이다. 이에 선조는 사당을 지어 인근 주민에게 향사토록 했는데 이것이 쌍충사의 전신인 이대원 묘당이다. 정운은 서애 류성룡의 천거로 1591년 녹도 만호로 부임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에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옥포, 당포, 한산 해전 등에서 선봉장으로 전과를 올리고 몰운대에서 순절하였다. 이에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청하여 1592년 그 위패를 합향(함께 제사 지냄)하였다.''이대원 사당'에서 출발한 쌍충사손죽도는 이순신이 처음 수군 장수가 되어 근무했던 발포진에서 남쪽으로 직선 40리(12km) 거리에 있는 섬이다. 손죽도와 관련되는 어이없는 실화가 1587년(선조 20) 2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왜적이 흥양(고흥)에 침범하였는데, 녹도를 지키는 장수 이대원이 막아서 싸우다가 패하여 죽었다. 이보다 앞서 왜선 수 척이 녹도 근처에 침범했을 때 이대원이 미처 주장(수사)에게 보고하지 않은 채 그들을 쳐서 수급을 벤 일이 있었는데, 수사 심암은 그가 자기의 공으로 삼은 것을 미워하였다. (심암은 그 공을 자기가 세운 것으로 하자고 이대원에게 말했다가 거절당했음.) 얼마 안 되어 왜선이 손죽도를 침범하자, 심암이 이대원을 선봉으로 삼고는 뒤이어 응원하지 않았다.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대적이 되지 않았으므로 이대원이 전사했다. 조정에서 그 사정을 알고 심암을 잡아 신문한 다음 효수(목을 베어 거리에 내걺)하여 대중을 경계하였다.'
억울하게 죽은 이대원
문화재청 누리집의 쌍충사 해설 |
충열공 이대원(1566∼1587)과 충장공 정운(1543∼1592)을 모신 사당이다. 이대원은 선조 20년(1587) 녹도 만호가 되어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대파하였고, 다시 흥양에 왜구가 침입하자 맞서 싸우다가 손죽도 해상에서 순절하였다. 이에 선조는 사당을 지어 모시게 했는데 이것이 쌍충사의 전신이다.
정운은 선조 24년(1591) 녹도 만호로 부임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장군과 함께 목포 · 당포 · 한산 해전 등에서 용감히 싸우다 부산 몰운대에서 순절하였다. 선조 25년(1592) 이순신 장군의 청으로 이대원과 함께 사당에 모시게 되었다.
정유재란으로 불타 버린 것을 숙종 7년(1681) 새로 짓고, 2년 뒤 쌍충사로 사액되었다. 영조 11년(1735)에 보수하였고 고종 5년(18 6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되었다가 1922년 고흥향교 선비들이 다시 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42년 일본인들이 폐허로 만든 것을 1957년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건물 배치는 맨 위쪽에 앞면 2칸, 옆면 1칸 반의 사당이 있고 아래쪽과 왼쪽에는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의 강당이 있다. 오른쪽 밑으로는 강당과 마주보게 관리사를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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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원이 전사한 바로 그해(1587년)에 녹도진성 안에 그를 기리는 사당이 세워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그해 12월 정운이 다대포에서 전사하자 이순신이 조정에 건의하여 그를 이대원 사당에 함께 모셨다. 임금이 '쌍충사'라는 편액을 내린 때는 1683년(숙종 9)이다.
계단 입구 안내판 옆에 지도가 첨부된 또 다른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역사 유적지를 찾았을 때는 이런 종류의 안내판을 성심껏 읽어야 한다. 가장 압축된 해설이기 때문이다. 이 안내판은 제목이 「1관 4포」로, 고흥의 군사상 중요성을 강조하고 녹도진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흥양현은 고려 말 · 조선 초 왜구가 창궐하면서 연해 방어의 거점으로서 부각되었다. 그 예로 전라 좌수군이 관할하는 5관(순천 도호부, 낙안군, 보성군, 광양현, 흥양현) 5포(방답진, 사도진, 여도진, 발포진, 녹도진) 중 1관(흥양현) 4포(사도진, 여도진, 발포진, 녹도진)가 이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임진왜란 기간 동안 흥양의 1관 4포는 중요한 수군 거점으로 활용되었다.수군의 지휘 체계는 수군 절도사(종3품)- 첨절제사(종3품)- 만호(종4품)로 이루어졌는데 사도진에는 첨사(종3품)가, 여도진, 녹도진, 발포진에는 만호(종4품)가 주둔하였다.녹도진은 만호가 배치된 수군진으로,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곽은 성종 21년(1490)에 2020척, 높이 13척 규모로 축조되었으나 현재 일부 잔존 석렬(돌의 줄)만 남아 있는 상황이다. (척= 자= 약 30.3cm, 2020척= 약 6,666cm, 13척= 약 393.9cm)임진왜란 당시 녹도진은 전라 좌수영 소속의 수군진으로 녹도 만호 정운과 송여종이 이순신 막하에서 활약하였다. 정운은 돌격장으로서 많은 해전에 참여하였지만 안타깝게 부산포 해전에서 순절하였다. 그의 후임인 송여종도 이순신과 함께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특히 절이도(현 고흥군 거금도) 해전과 노량 해전에서 크게 기여하였다.녹도진성 안에는 녹도 만호로 순절한 이대원과 정운을 배향한 쌍충사가 있었으나 서원 · 서우 철폐령에 따라 19세기에 훼철되었다가 1957년에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