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부터 온전히 내 몸이 통과해 온 이야기를 하려 한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미리내의 이야기인 동시에 무수히 많은 82년생 김지영, 92년 김지영, 2002년 김지영... 그녀들 자신의 이야기일 것이다.
pixabay
[하나] 시골의 작은 중학교
여자아이들이 유독 싫어하는 선생(님이라는 말도 쓰고 싶지 않다)이 있었다. 그가 유독 체벌을 많이 한 것도, 그렇다고 숙제를 많이 내준 것도 아니었지만 여자아이들은 그를 만나면 슬슬 피하곤 했다.
그는 수업시간이면 나를 포함한 내 친구들의 몸을 만지곤 했다. 그가 나의 귓불을 만지작거리고, 나의 팔 안쪽 살을 주물렀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때는 그것이 성추행이라는 것을, 그런 개념 자체를 몰랐다. 하지만 그런 그의 행동이 매우 불쾌하고 나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는 것은 매우 선명한 몸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후, 성인이 된 어느 날 신안의 어느 남선생이 지적장애 여자아이를 성폭행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내 친구들과 나는 그 선생이 분명히 맞을 거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그제야 우리가 그 당시 소리내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그가 했던 행동이 성폭력이었고, 모두가 다 공동의 피해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 대학 시절 농촌활동대학 시절 매년 봄, 여름으로 농촌 활동을 갔다. 우리는 '농촌 봉사활동'이 아닌 농민들과 학생들이 정치적으로 연대하는 '농촌 활동'이라고 이름 붙이고 그 활동에 정성을 다하곤 했다.
그 시절, 나의 역할은 학교 측 농활 대표. 농활 마지막 날, 농민회 분들과 다친 사람 없이 무사히 농활을 마쳤다는 기쁨을 나누며 마지막 마무리 집회를 했다. 모두가 들떠 있던 순간, 몇 명의 농민분들이 나를 따로 불러 '학교를 총괄하느라 고생했다'며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서운하게 보낼 수는 없다'는 말에 결국 한 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함께있던 분들이 하나둘 사라지더니 한 명의 남성 농민분과 나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어색한 분위기. 그리고 그가 나를 향해 던진 말.
"어이, 너 남자한테 얼마나 대줘봤어?"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이지' 싶어 멍하게 있었지만, 그가 계속 내뱉는 말들이 성희롱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순간, 화가 나기보단 두려웠다. 그 공간엔 그와 나밖에 없었고, 당장 그곳을 빠져나올 방법도 마땅히 보이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는 계속 성희롱을 하더니 급기야 나를 끌고 어딘가로 가려고 했다. 급하게 그 공간을 빠져나와 아는 농민회 선배에게 전화했다. 상황 설명도 하지 못한 채 울먹이며 그저 도와달라고 말했다. 선배는 가게 상호명을 듣고 바로 달려와 나와 함께 그 공간을 빠져나왔다.
그의 차에서 얼마나 울었던지... 그리고 한동안 나는 나 자신을 원망했다.
'왜 거길 무턱대고 따라간 거야?' '왜 그 순간 그에게 단호하게 화내면서 그만하라고 말하지 못한 거야?' 그 질문은 그 시절 내내 나를 괴롭혔다.
[셋] 20대 시절, 언니와 함께 원룸아침에 일어났는데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그건 언니도 마찬가지. 내 지갑만 안 보였다면 어디선가 잃어버렸겠거니, 짐작했겠지만 언니의 지갑까지 없어진 걸 확인하고서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걸 확인하던 순간, 언니와 난 이야기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혼자 있었으면 분명..." 서로 '강간'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우린 알고 있었다. 혼자였다면 그냥 이런 해프닝으로 끝나진 않았을 거란 걸.
[넷] 여자 둘 살던 옆집 새벽녘, 날카로운 비명 소리에 잠이 깼다. 그리고 이어지던 투덕거리는 소리. 옆집이다. 복도형 원룸 아파트에 살고 있던 때, 옆집에 사는 분들과 살갑게 인사를 나누진 못했지만 그래도 서로 눈인사는 건넨 터였다. 그 집에 엄마와 딸, 두 사람만 사는 건 알았다.
강도가 들었구나 짐작한 우리는 신고하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까 두려워하며 이불 속에 들어가서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당장 밖으로 나가 그들을 도와줄 순 없었다. 우리도 공포에 압도된 상황이었으니까.
경찰이 출동하는 소리를 듣고 그 새벽 꼬박 밤을 새우며 두 사람이 무사하길 빌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어느 날 옆집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 찾아오셨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랬다. 화장품 가게를 운영하셔서 늦은 퇴근을 하던 그녀는 그날따라 문을 제대로 잠그지 않았던 것 같다고. 새벽에 딸이 먼저 강도를 발견해 소리를 질렀고, 칼을 들고 있던 강도는 몇 번 위협하다 도망갔다고. 그녀는 연신 '신고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 일이 있고 밤마다 옆집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딸로 추측되는 울음소리. 그 소리를 매일 밤 듣던 나도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틀 동안 고열에 시달렸다. 급기야 시골에 계시던 엄마가 올라오셔야 했다. 그리고 매일 밤 울던 그녀의 딸과 그녀는 한 달도 안 돼 이사를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