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종주의 시작점, 노고단 고갯마루에서이때까지만 해도 아이들은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서부원
휴가철 주말인데다 날씨마저 선선했는데, 성삼재 휴게소는 의외로 한산했다. 예전엔 주차장이 만원이라 입구에서 아예 버스의 진입을 막는 경우도 흔했다. 산에 오르기에 조금 늦은 시간인 탓일까. 산책 삼아 노고단을 다녀오려는 가벼운 옷차림의 가족 단위 등산객들만 간간이 보일 뿐, 지리산 종주를 목표로 한 우리 같은 단체 등산객들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헛갈리지만, 성삼재 휴게소가 문을 연 뒤 성산 노고단은 '뒷동산'이 되었다. 샌들 차림의 어린 아이와 손잡고 산책 삼아 다녀올 수 있을 만큼 쉽고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느긋한 걸음으로 왕복 두세 시간이면 충분하다. 도로가 지리산을 관통하기 전까지만 해도 노고단은 화엄사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꼬박 네다섯 시간 발품을 팔아야 가닿을 수 있는 신성한 곳이었다.
노고단에 오르는 길, 아이들의 입에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노고단 대피소에 이르는 넓은 도로를 보고는 "괜히 쫄았다"면서 배낭을 메고 달리는 시늉을 해보이기도 했다. 그것이 섣부른 객기였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계단길이 나타날 때마다 아이들은 헉헉대기 시작했고, 노고단 대피소에 채 닿기도 전에 온몸은 땀에 절어버렸다.
주능선 코스가 시작되는 노고단 고갯길에 오르자 짙은 구름이 산을 휘감기 시작했다. 지리산의 기상예보는 전혀 믿을 게 못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리산의 날씨는 변덕스럽기로 유명하다. 당장 호우라도 내릴라치면 주능선 코스로의 진입조차 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비만 내리지 않는다면 구름은 산행에 있어 더없이 고마운 존재다. 여름철 땡볕을 가려주기 때문이다.
서둘러 단체사진을 한 장 찍은 후, 고갯마루를 넘어 교행이 어려울 정도로 좁은 길에 들어섰다. 진짜 지리산 종주는 이곳에서부터다. 임걸령과 삼도봉을 거쳐 뱀사골과 피아골 계곡이 만나는 화개재에 이르는 6km 남짓의 산행 길은 주능선 코스 중 가장 평이한 구간이다. 초보자도 세 시간 남짓이면 족하다. 나중 아이들은 이 구간을 지리산을 종주하려는 등산객들에게 건네는 지리산의 '반가운 환영 인사'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쉬웠다는 뜻이다.
두꺼운 구름은 햇볕만 가로막는 건 아니다. 능선에서 내려다보이는 경관도 차단했다. 숲의 터널을 통과해 이따금 사방이 탁 트인 곳이 나와도 그때마다 짙은 구름은 자신의 모습 외에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어디가 하늘이고 산인지조차도. 아이들은 지금 걷고 있는 곳이 구름 속이라는 것 외에 여기가 지리산임을 알려주는 건 아무 것도 없다며 투덜거리곤 했다.
"하나를 얻었으면 기꺼이 다른 하나를 포기할 줄 알아야 해. 두 가지를 모두 바랄 순 없어."몇 시간 째 지리산의 풍경은커녕 구름 때문에 배낭과 옷만 눅눅해졌다는 친구들 앞에서 한 아이가 어른스럽게 꺼낸 말이다. 자신은 걷는 게 너무 힘들어서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햇볕보다는 차라리 구름이 낫다고 말했다. 날씨를 차치하고라도 거의 백리 길을 이틀 안에 완주해야하는 빠듯한 상황에서 풍경 운운하는 게 사치라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점심을 먹은 뒤 오후가 되자 아이들의 체력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리산의 '환영 인사'가 끝나는 화개재부터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이어지는 구간에서다. 더욱이 세 시간 거리인 연하천 대피소까지는 변변한 약수터조차 없다. 이즈음 아이들은 물을 마시기 전에 반신반의하며 소금을 찾았고, 이내 소금의 가공할 '위력'에 놀라기 시작했다.
출발 전 개인적으로 반드시 챙겨야 할 준비물 목록에 소금이 있다는 걸 아이들은 의아하게 여겼다. 한 아이는 소금은 챙기면서 왜 고춧가루나 조미료 등은 왜 뺐느냐며 반문하기도 했다. 소금을 단지 취사용으로 생각한 것이다. 수업시간에 배웠을 텐데도, 아이들은 땀이 많이 날 때는 물 대신 소금이 효과적이라는 것과, 물을 충분히 마시되 한꺼번에 많이 들이켜서는 안 된다는 '상식'을 이번 산행을 통해 얻게 된 최고의 수확이라고 말했다.
출발 전 아이들의 배낭 속을 일일이 확인하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전날 각자 준비할 목록을 인쇄해 나눠주고 일일이 종이에 적어보게 하는 등 입이 닳도록 강조했건만, 막상 배낭엔 그것들이 아예 없거나 턱없이 부족했다. '충분히', '넉넉히'라는 말을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이들마다 달랐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산행이 난생처음인 아이들을 탓할 수 없는, 내 불찰이었다.
이동 중에 에너지를 보충할 수 있도록 초코바나 견과류, 육포 등을 충분히 챙기라고 했더니 고작 두세 개 담아온 아이가 태반이었다. 또, 아침과 저녁 추위를 막을 수 있도록 바람막이 점퍼나 긴팔 옷을 준비하라고 신신당부했건만, 설마 한여름에 추울 줄 몰랐다며 그제야 후회하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내 배낭 속 초코바와 점퍼는 그런 아이들을 위한 몫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연하천 대피소에 이르자 아이들은 가을철 낙엽 마냥 바닥에 널브러지기 시작했다. "여기가 숙소였으면 좋겠다"는 하소연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족히 두 시간은 더 걸어야 벽소령 대피소에 닿을 수 있다는 말에 모두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을 위로해준 건 단 하나, 연하천의 샘물이었다. 아이들은 '물이 꿀처럼 달다'며, 이런 느낌은 여태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연하천에서 벽소령에 이르는 3.6km는 실제 거리보다 심리적 거리가 훨씬 먼 구간이다. 2박3일의 여유로운 일정이었다면, 대개 연하천 대피소를 첫날 숙소로 예약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그다지 험하거나 길지 않은 이 구간이 이틀 간의 산행 중 가장 힘들었다고 손꼽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산중의 해는 빠르게 저물었고, 그렇잖아도 지친 아이들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후 6시를 넘겨서야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했다. 짙은 구름 사이로 어슴푸레 달무리가 보였고, 이내 주위가 어두워졌다. 아이들은 서둘러 찾아든 어둠에 낯설어했다. 구름에 긁힌 달은 끝내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듣자니까, '벽소명월(碧霄明月)'이라 하여, 이곳에서 바라본 푸른 달빛이 지리산 8경 중 하나로 손꼽힌다고 하는데, 내심 아쉬움이 컸다.
대피소의 침상에 몸을 누이자마자 아이들은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세수나 양치질은커녕 양말조차 그대로 신은 채 잠든 아이도 보였다. 부러 깨워 준비해 온 물티슈로 몸을 간단히 닦게 한 후 억지로 옷을 갈아입게 했다. 발 냄새, 땀 냄새 가득한 침상 위에서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잠든 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수학여행 때라면 밤새 수다 떨며 놀았을 아이들이다.
출발 전 아이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씻는 문제였다. 산 위에서 하루 묵는다는 걸 설레어하던 한 아이는 따뜻한 물로 샤워할 수 있는지를 물었고, 비누나 샴푸를 못 쓰게 하면 얼굴에 바른 선크림은 어떻게 지우냐며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평상시 샤워를 못하면 잠을 잘 수 없다는 이유로 참가를 포기한 아이가 있을 정도로, 아이들에게 씻는 건 먹는 것 못지않게 절박한 문제였다.
그토록 고민하던 몸 씻기와 양치질조차 귀찮고 번거로운 일로 여길 만큼 피곤한 하루였던 거다. 불과 버스 두세 정거장 거리도 차를 타고 등교하는 아이들에게 17km는 여태껏 단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거리일 게다. 그것도 험한 산길이었으니, 발이 퉁퉁 붓고 곳곳에 물집이 잡힌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들이 분신처럼 여기는 스마트폰도 이곳에선 애물단지가 되어 발아래 나뒹굴었다.
[둘째 날] 벽소령 대피소에서 지리산 정상 천왕봉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