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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정 도서정가제는 3년만 한시적으로 시행하기로 한 것이어서 오는 11월이면 어떤 형태로든 개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다시 예전처럼 신간에만 정가제를 적용하는 방식으로 돌아가거나 또는 지금보다 더 강하게 할인 판매를 제약하는 쪽으로 개정될 수도 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어떤 개정 방향을 원할까? 자신의 입장을 먼저 가다듬어 보고 이하의 글을 읽는다면 이해당사자의 한 사람이 되어 도서정가제 논쟁이 한결 실감나게 다가올 것이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가 출판사, 서점 등과 협의체를 구성해 도서정가제 개선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즈음하여 SNS 등에서는 도서정가제를 반대하는 소비자들의 목소리가 점증하고 있다. 일부 언론도 정가제로 책값 부담이 늘어나고 독서 인구가 줄어들었다는 논리를 펴면서 도서정가제 비판에 가세하고 나섰다.
재화를 싸게 살 권리를 요구하는 소비자의 목소리는 당당하다. 자본주의 시장 경쟁의 논리에 기반을 둔 일견 상식적이고 익숙한 주장으로 보인다.
그런데 소비자 여론이 도서정가제에 대해 썩 우호적이지만은 않은 데 비해 책을 공급하는 출판계나 골목상권에서 책의 소매를 담당하는 지역 서점들의 의견은 사뭇 다르다. 문체부가 도서정가제 시행 1년 후 출판 종사자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바에 따르면 67%의 응답자가 현행 도서정가제의 유지 또는 강화에 찬성했다. 출판계나 지역 서점업계의 이러한 반응은 전형적인 자기 밥그릇 챙기기 식의 공급자 관점일까?
도서정가제를 둘러싼 이 두 관점의 차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먼저 정확히 할 사항이 있다. 도서정가제의 취지는 도서 가격의 단일가 확립이지 높은 책값을 유지하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책을 사는 독자들은 물론이고 출판 종사자들 중에서도 이를 혼동하거나 오해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단일가란 전국 어느 서점에서 책을 구매하건 가격이 동일하다는 뜻이다. 충청도 괴산의 어느 작은 숲속 책방에서 책을 사건,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사건 책 가격이 같아야 한다. 왜 그럴까. 온라인서점이나 대형서점, 온라인쇼핑몰 등과 같은 거대 유통서점들이 도서 가격을 임의로 조정함으로써 지역 서점들의 존립 근거를 허무는 일을 방지하자는 것이다. 규모에서 밀리는 동네 책방들은 가격 경쟁에서 절대 버텨낼 수가 없다.
온라인 서점의 등장으로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지역 서점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아 2003년 2250개에 달하던 서점은 지난해 1559개로 줄어들었고 그만큼 책은 독자들의 눈과 생활권에서 멀어져 갔다. 동네 작은 책방은 대형서점이나 온라인 서점과 이미 체급부터 다르다. 그런데 가격마저 불리하다면, 게임은 해보나 마나 아닌가. 지역 서점들이 최소한 경기 룰이라도 불리하지 않도록 어디에서나 책값을 동일하게 받아야 한다고 규정한 것이 도서정가제의 핵심이다.
10년 된 휴대폰과 10년 된 책의 차이어라, 그런데 단일가를 위해 할인을 못하게 하니 결국 책값 부담이 늘어나는 것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도서정가제는 이미 매긴 책 정가를 함부로 낮추어 팔지 못하게 할 뿐이지 정가 책정 자체에 관여하지 않는다. 만일 시장 수요에 비해 정가가 높다면 그 책은 당연히 팔리지 않는다.
출판사가 정가를 책정할 때는 제조 원가를 고려하여 초판을 팔아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있는지 여부와 함께 반드시 시장 수요를 검토한다. 경쟁도서에 비해 값이 비싸지는 않은지, 해당 도서 수요층의 구매력에 비추어 적절한 가격인지 판단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정가는 수요에 부응하는 정도로 조정된다. 도서정가제가 있다고 해서 출판사가 시장 원리를 거슬러서 일방적으로 높은 책값을 매길 수는 없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도서 시장은 서점 수보다 출판사 숫자가 월등히 많은 공급 과잉 시장이다. 게다가 영화, TV, 핸드폰에 점점 더 독자를 빼앗기면서 독서 인구는 갈수록 줄어들어 책값은 물가 상승률조차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한국 출판계는 2천여 군소 출판사가 동일 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완전 자율경쟁시장이라 보아도 무리가 없다. 즉, 정말로 부당하고 높은 가격을 매기는 출판사는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실제로 개정 도서정가제 이후 책값은 낮아지고 있다. 문체부 조사에 의하면 개정 도서정가제 이후 발행도서의 평균 정가는 그 전해에 비해 6.2% 하락했고 특히 가계 부담이 큰 유아와 아동도서의 경우 평균 정가가 18.9% 하락했다. 할인의 추억이 워낙 강하게 남아 독자들 입장에서는 정가대로 사는 게 매우 비싸다고 느끼지만, 초판을 다 팔아도 손익을 맞추지 못하는 수준에서 정가가 결정되는 경우가 더 많다.
신간은 그렇다 치고 출간된 지 몇 년이 지난 책들은 투입 비용을 충분히 회수했으니 할인을 해줘야 마땅한 것 아닌가? '10년 지난 휴대폰을 출시 가격에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라며 구간 할인 금지를 비판하는 글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세월이 지나면 기능이 떨어지는 전자제품과 달리 책은 5년 10년이 지난다고 가치가 대폭 달라지지 않는다. 물론 실용정보서 등을 제외한 이야기다.
<논어>, <데미안> 같은 책의 가치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또한 오래된 구간을 무조건 출시 가격으로만 팔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구간에 대해 정가를 다시 책정하여 합리적 가격에 내놓을 수 있는 도서재정가제가 도서정가제와 함께 실시중이다.
처음 출시할 때 2만원이던 책을 18개월이 지난 후 1만원으로도 5천원으로도 조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해마다 수천 종의 책이 이렇게 재정가 도서로 판매된다. 물론 이런 재정가 도서도 일단 정가를 정하면 도서정가제의 취지에 따라 할인율은 제한된다. 이렇게 보면 도서정가제로 책값 부담이 늘어났다는 주장은 절반 이하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책과 지식 생태계 빈곤의 악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