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위세 유허비
정만진
1734년부터 문익점을 추가로 제사에 모셔 문익점을 추가로 모시게 되는 것은 1734년(영조 10) 이후부터이다. 문위세가 문익점의 9대손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뛰어난 선조를 배제한 채 후손만 제사 지내는 부담감이 작용을 했을 법하다. 뛰어난 선조를 서원에 모심으로써 가문의 명예를 더욱 빛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강성'이라는 서원 이름은 정조가 1785년(정조 9)에 붙여주었다.
문위세는 임진왜란 당시 전라 좌의병의 양향관(糧餉官, 군량미 모집 책임자)으로 활동했다. 조정은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 정유재란 사이의 공백기인 1595년 문위세를 용담(전북 진안) 현령에 임명했다. 이는 조정이 그의 공로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증거이다.
도원수 권율의 『만취당 실기』에도 '문위세가 공을 세움으로써 그(권율)가 조정에 보고하여 (문위세가) 현감이 되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조원래 논문 「문위세」).'
조정과 권율이 인정한 문위세의 공로조원래는 '임진왜란 시 문위세 일가의 의병 운동은 자신을 주축으로 장흥 남평문씨 가의 부자, 형제, 숙질(아저씨와 조카), 옹서(장인과 사위) 간은 물론 문중의 재종질(7촌)들까지 한 덩어리가 되어 일어난 전형적인 일문창의(一門倡義)라는 점에서 주목된다.'라고 평가한다. 일문창의는 한 집안 사람들이 대거 의병에 동참했다는 뜻이다.
문위세 집안사람들의 개인별 의병 활동을 알아본다. 그들 사이의 친인척 관계도 살펴봄으로써 일문창의의 뜻도 헤아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