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 감사 이광, 충청 감사 윤선각, 경상 감사 김수의 연합군은 3만에 이르렀지만 불과 1,600명에 불과한 일본군에 참패하여 죽고, 흩어졌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평양을 버리고 압록강을 향해 더 북쪽으로 피란을 떠났다. 사진은 당시의 참혹한 패전을 지켜본 수원 광교산.
정만진
하지만 6월 5일과 6일에 걸친 수원 광교산 일원 전투에서 이광 군은 일본군에게 무참하게 부서졌다. 일본군은 1,600명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충청도와 경상도 지원군까지 합해 3만을 헤아리던 이광 군은 제대로 싸움 한번 못한 채 죽거나 흩어졌다. 선조는 이 소식을 듣고 평양을 떠나 의주로 더 멀리 떠났다.
임금을 지키기 위해 선조가 있는 곳으로 북진하는 전라도 의병들
전라 좌도와 우도의 의병이 각각 근왕(임금을 지킴)을 위해 본도를 떠났다는 대목도 당시의 사정을 짐작하게 해준다. 경상도와 달리 전라도는 1592년 4∼5월 일본군의 침입이 없었으므로 이곳 의병들은 향토를 지키는 데 골몰할 까닭이 없었다.
1593년 1월 당시 나주 지역을 대표하는 의병장 김천일이 3,000 군사를 이끌고 강화도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 단적인 사례이다. 이는 '조선의 현재 병력과 주둔지를 보고하라'는 명나라 군대의 요구에 따라 그해 1월 11일 조선 정부가 명에 보고한 내용이다(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그때 곽재우는 경남 의령에, 김면은 경남 거창에, 성안의는 경남 창녕에, 정인홍은 경남 창녕에 주둔하고 있었다.
▲김천일을 제향하는 나주 정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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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창의한 나주의 김천일 의병군이 벌써 도성 인근의 경기도까지 진격한 데 비해 그보다 약간 늦은 담양의 고경명 의병군은 그 대신 6,000에 이르는 많은 의병을 모아 북진하고 있었다. 고경명 의병군은 6월 27일 은진(논산군 은진면)에 당도했다. 그때 왜적이 금산을 정령한 후 전주를 거쳐 호남 전역을 침탈하려 든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고경명 군은 이미 평양까지 피란한 조정을 뒤따라 가 근왕을 하는 일보다 곡창 호남을 지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였다.
고경명 군은 7월 1일 은진에서 약 20리(8km) 떨어진 연산으로 회군했다. 6월 22일 군수 권종의 군대를 제압한 일본군이 진을 치고 있는 금산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이었다. 고경명은 충청도 의병장 조헌에게 형강(금강의 대청호 쪽 상류)을 건너 와 7월 10일 금산의 왜적을 함께 치자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조헌은 그 날까지 의병을 제대로 모으지 못해 전투에 참전하지 못했고, 고경명 의병군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관군과 더불어 일본군을 공격했다. 하지만 세력이 약하고 전투 능력에서도 뒤떨어진 아군은 일본군을 제압하지 못했고, 오히려 고경명, 유팽로, 안영, 고경명의 차남 고인후 등 장졸들이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광주 포충사는 1차 금산성 싸움에서 순절한 고경명, 유팽로, 안영, 고인후와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한 고종후를 제향하는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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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전라도 의병군은 재기를 모색했다. 고경명의 지시에 따라 모병 활동 중이었던 관계로 금산 전투에 참전하지 않아 삶을 유지한 문홍헌이 앞장을 섰다. 문홍헌은 화순의 최경회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여 7월 26일 광주에서 800여 명으로 기병했다. 이를 흔히 '전라 우의병'이라 부른다.
1차 금산성 패전 이후 재기를 모색한 전라도 의병들박광전, 임계영 등 전라 좌의병 수뇌부가 창의를 하면서 지역 선비들에게 배포한 격문을 계속해서 읽어본다.
'지금이 바로 의로운 선비들이 분발해야 할 때입니다. 왜적이 성 아래에 이르러 장정들을 무참히 죽이면 불쌍한 우리 백성들은 어디에 몸을 두며 가족들은 어느 곳에 둔단 말입니까? 영남이 이미 그렇게 당한 사실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으니 숲속으로 도망쳐 숨으려는 계획도 옳지 않고,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하려는 계획도 잘못된 것입니다. 죽는 것이 매한가지라면 어찌 나라를 위해 죽지 않겠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요충지를 잘 막아 왜적의 기세를 차단한다면 사지에서 살 길을 구하는 것도 이 기회에 이루어지고, 치욕을 씻고 나라를 수복하는 것도 이 시기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전라좌도와 전라우도 |
1018년(현종 9) 이전까지 지금의 전북은 강남도(江南道), 전남은 해양도(海洋道)로 불렸다. 1013년부터는 합쳐서 전라도라 했다.
1407년(태종 7) 전라도와 경상도를 좌ㆍ우도로 나누었다. 전라도는 동쪽 산악 지대를 좌도, 서쪽 평야 지대를 우도라 했고, 경상도는 낙동강을 경계선으로 하였다. 임금이 있는 왕성을 좌우의 기준으로 삼았으므로 남원ㆍ담양ㆍ순창ㆍ용담ㆍ창평ㆍ임실ㆍ장수ㆍ곡성ㆍ옥과ㆍ운봉ㆍ진안ㆍ무주ㆍ광주 등 24개 고을이 전라좌도에 들었다.
관찰사는 별도로 두지 않았고 군사 책임자인 병사兵使와 수사水使만 각각 배치했다. 1892년(고종 33) 남ㆍ북도 체제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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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도내에는 필시 누락된 장정과 도망친 군졸들이 있을 것이니, 만약 식견 있는 선비들을 시켜 서로 불러 모아 권장하고 격려하며 힘을 합해 떨쳐 일어나 스스로 군대를 만들어 왜적이 향하는 곳을 감시하여 요충지를 굳게 지키게 한다면, 위로 왕의 군사를 성원할 수 있을 것이요, 아래로는 한 지역 백성들의 목숨을 보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회에 힘껏 도모하여 영남 사람처럼 되지 맙시다.
영남 사람들은 왜적과 맞선 초기에 한마음으로 막아낼 생각은 않고 머리를 싸매고 도망쳤으니 이것이 비록 황급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라 그랬을지라도 오늘날 다시 생각해보면 후회가 될 것입니다. 적의 기세가 창궐하여 집이 불에 타고 처자가 능욕을 당한 뒤에야 선비들이 떨쳐 일어나 많은 적을 베고 잡으니 조금 마음이 든든하지만 또한 이미 늦었습니다. (하략)'전라 좌의병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7월 20일 보성에서 기병했다. 부장으로는 문위세 휘하에 이충량, 김익복 휘하에 유여환이 활동했다. 특히 무과에 급제한 경력의 전 사천 현감 장윤이 임계영 의병장 부대에 합류하면서 전라 좌의병의 기세는 한결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