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의 질문은 나의 '벽장'을 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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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3 시절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나는 같은 반의 친구 한 명을 좋아했다. 그리고 우리 학교는 공학이 아닌 남자 중학교였다.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춤도 잘 추며 노래도 잘하던 그 친구의 이름이 아직 기억난다. 중2 때까지는 외양 자체에 무관심했던 내가 중3 때는 꾸미고 싶어졌다. 잘 안 감던 머리를 더 자주 감았고, 세수 후에는 로션과 스킨을 바르기 시작했다.
중3의 1년은 금세 흘렀고 졸업식 날 그에게 난 손편지를 건넸다. 너는 참 멋있고, 그래서 많이 친해지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고, 그렇지만 같은 고등학교를 가게 되어서 좋다고, 고등학교에 가서는 친해지고 싶다고, 몇 장을 썼다 구겼다 하면서 마음을 꾹꾹 눌러 적은 편지를 건넸다.
물론 답장은 없었다. 사실 기대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그 당시의 나의 마음은 이제와서야 번역하길 "like"가 아닌 "love"라는 동사를 사용하게 된다. 첫사랑의 개념 정의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제법 폭넓게 정의를 한다면 그도 나의 첫사랑이란 영역에 들어오게 되지 않을까?
물론 그 당시에는 그 감정을 "love"라는 동사로 의미화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첫사랑이라는 범주를 떠올릴 때 이 당시의 경험의 기억은 고스란히 빠져 있었던 것이다. 잊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기보다는 감춰져 있었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나는 이 경험과 이 경험의 기억을 내 머릿속 벽장 속에 꽁꽁 감춰 두고 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의 일이다. 흡연자들은 대개 화장실에 좌변기가 있는 곳에서 담배를 피곤 했다. 소변을 보러 화장실에 들어간 나는 좌변기가 있는 칸 안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걔 진짜로 너 좋아하는 거 아냐?""아, 몰라. 중학교 때부터 짜증났어."후자는 그 아이의 목소리였다. 나는 급히 화장실을 나왔다. 그리고 어떤 감정의 뭉텅이들을 벽장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런 감정들을 벽장 속에 집어넣었다는 기억마저도 벽장 속에 함께 집어넣었다. 나의 그 감정들은 누군가들에게 "짜증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15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교수님, 혹시 성소수자이신가요?"짧은 질문이 15년간 굳게 닫혀 있던 벽장을 열었다. 나는 순간 너무 놀라서 운전을 멈추고 길가에 차를 세웠다. 차문을 열고 나와 선글라스를 벗고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세계가 달라졌다. 양분법의 세계가 와장창 깨졌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는 양분법의 세계. 이성애자가 있고 동성애자가 있는 양분법의 세계가 깨졌다. 그 양분법의 세계에서 이성애자에 위치하고, 나는 여자를 사랑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믿음이 깨졌다.
세계를 흑백으로 나누던 선글라스가 벗겨지자, 이 세계는 규정할 수 없는 색깔들로 가득찬 총천연색의 스펙트럼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나는 자문했다. 그럼 나는 어디에 위치하는 것이지? 나는 무슨 색인 것일까? 답할 수 없었고 답하지 않기로 했다. 답하지 않아도 나는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고, 규정할 수 없어도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동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매우 미시적으로 설정할 수 있는 타임머신이 개발된다면 나는 위의 쉬는 시간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는 "아뇨, 전 다수자인데요?"라고 말하는 나의 입을 막아야지. 그리고는 대신 답할 것이다.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계속 잘 모르는 중이에요. 하지만 전 여기에 있어요."그리고 손을 잡아주며 감사하다고 말해주어야지. 당신은 언젠가 내 벽장을 열어준 적이 있다고, 선글라스를 벗겨준 적이 있다고, 나의 세계를 더 자유롭게, 더 많게, 더 아름답게 만들어 준 적이 있다고.
#장면 2이 이야기는 그다지 꺼낸 적 없던 이야기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니 결과부터 이야기하자. 한 소설가가 내가 잠든 사이 성행위를 시도하려 한 바 있었다. 그 소설가는 나보다 나이가 꽤 많은 여성이었고, 한 학기 나를 가르쳤던 강사 선생님이었다.
친구가 어떤 지방 소도시로 놀러 가지 않겠냐고 했다. 그곳은 그 친구와 내가 함께 들었던 창작 수업의 선생님이 계신 곳이었다. 그 선생님의 집에 놀러 가서 술을 맛있게 먹고 온다는 계획. 술도 좋아하고 사람도 좋아하는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계획이었다. 흔쾌히 응했다. 술을 마시기 전에는 술을 마신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모두 술에 거나하게 취했다. 일이 일어났다. 내가 잠든 사이 내 하의가 벗겨져 있었고 그 선생은 물리적인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다. 잠에서 덜 깬 와중에도, 그리고 술에 취한 와중에도, 너무나도 놀란 와중에도 난 분명히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그러나 나는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저항은 하지 못했다. 그곳은 그 사람의 집이었고, 나는 술에 취해 있었고, 게다가 그곳엔 다른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해야만 끝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행위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동조는 아마도 보통 "너도 원했잖아"로 치환되어 버리고 말겠지. 나도 원했던가? 아니면 그것은 나의 착각인가? 잘 모르겠다. 하여간 적어도 당시의 내 몸은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 몸이 너무 취해, 성행위를 할 수 없는 상태임이 확인되자 그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멈추었다. 그렇게 그 밤은 지나갔다.
사실 술을 마시는 동안에도 그 사람은 나에게 "너 문단에 나오면 누나들이 참 좋아하겠다. 예쁘게 생겨서. 자기 옆에 앉으라고 막 그럴 것 같아. 나 정도 나이 되면 완전 어린 애들보다 너 정도 나이 있는 애들을 좋아해" 등의 발언을 하였다. 그때는 그랬다. 다들 깔깔깔 웃겼다. 함께 그곳에 간 친구도 함께 깔깔깔 웃었다. 동석한 다른 친구에 비해 예쁘다고 해주니까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다. 몰랐다, 그때는. 그게 이제 와서는 이렇게 기분 나쁘고 수치스러운 기억이 될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