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일순 선생 생가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친구들, 장일순 선생의 아드님, 필자.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아드님은 학생운동을 했다. 선생을 쏙 빼닮은 외모 덕에 마치 장일순 선생과 이야기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신영수
장일순 선생이 살던 생가는, 지금도 부인 이인숙 선생이 살고 계시다. 생가가 봉산동에 있다는 정보만 갖고서 우리는 무작정 봉산동으로 향했다. 그곳 봉산동성당에 여쭈면 위치를 알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정작 젊은 신부님은 장일순 선생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더운 날씨에 지친 우리는, 성당 건너편 카페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커피를 주문하면서, 주인 분께 혹시 장일순 생가의 위치를 아시냐고 물었다. 다행히 위치를 알고 계셨다. 잠시 더위를 식힌 우리는, 주인 분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 생가를 찾아갔다. 도보로 5분 거리였다.
파란 대문의 오래된 집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한 부부 내외분이 나왔다. 한눈에 장일순 선생의 아드님임을 알 수 있는 외모였다. 장일순 선생을 존경하는 대학생들이라 말씀드리니 반갑게 맞아주셨다. 실제로 나는, 중학교 때 장일순 선생과 이현주 목사의 대화록 <노자 이야기>를 읽은 게 이후 대학 철학과에 진학한 계기일 만큼, 선생을 존경했다.
내외 분은 시원한 수박을 썰어 주셨다. 수박을 먹으며 우리는 선생의 둘째 아드님과 말씀을 나눌 수 있었다. 장일순 선생의 악력은 익히 아는 바, 책에서는 보지 못할 '아버지' 장일순에 대한 얘기를 여쭈었다.
훌륭한 어른들은 공정무사한 성격 탓에, 정작 집안에는 소홀한 경우가 많다. 혹시 장일순 선생도 '나쁜 아버지'는 아니었는지, 나는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선생은 그런 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자식들에게도 따뜻했고, 자식이 하고자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고 믿고 묵묵히 응원해주시는 분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유명한 어른을 아버지로 둔 자식의 애환은 없었을까. '어른'을 아버지로 둔 부담감이 있었으리라 짐작했지만, 혹독했던 시절에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건 부담감보다는 위험한 일이었다고 했다. 오히려 감시가 매서웠는데, 군에 입대하자 장교가 이미 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꿰고 있을 정도였다.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여쭙고 들을 수 있었다. 당시에 선생을 찾아 온 운동가들이 동네에 많이 기거했고, 이를 감시하기 위해 세운 파출소가 바로 조금 전에 우리에게 생가 위치를 알려 준 카페 자리였다는 것 등, 책으로는 접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들었다. 원주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 혹 이 기사를 보고 생가를 찾아가고자 한다면, 평일은 피하길 부탁드린다. 선생의 부인이신 이인숙 선생께서 몸이 편찮으신 탓에 이제는 방문객을 받기가 어렵다. 주말에 아드님 내외가 오신다고 하니, 가야한다면 주말을 권한다.)'무위당사람들'을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