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 창의비 왼쪽은 '관찰사 윤공 웅렬 선정비'이고 오른쪽은 '관찰사 이공 근호 선정비'이다. 윤웅렬과 이근호는 1910년 조선이 망하도록 하는 데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거물 친일파들이다. 권율 창의비 앞에는 두 사람이 '대통령 소속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로부터 '친일 인사로 선정'되었다는 내용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정만진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 22-3 광주공원에 가면 '都元帥(도원수) 忠壯(충장) 權公(권공) 倡義碑(창의비)'를 볼 수 있다. 광주향교와 광주공원 사이의 산책로로 진입한 직후 오른쪽을 돌아보면 27기나 되는 탑들이 도열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권율 창의비다. 본래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던 선정비 종류의 빗돌들을 1957년 공원 입구에 모아 세웠다가 1965년 현재 위치에 옮겼다.
도원수 충장 권공 창의비라면 조선 최고 군사령관인 충장공 권율(1537∼1599)이 의병을 일으킨 것을 기리는 빗돌이라는 뜻이다. 도원수가 창의를 했다?
이치 패전을 뼈아파했던 일본 |
<선조수정실록> 1592년 7월 1일자 기사에 '왜적들은 조선의 3대 전투를 말할 때(稱朝鮮三大戰) 이치 전투를 첫째로 쳤다(梨峙爲最).'라는 대목이 있다. 1592년 7월 8일 이치 전투에서 대패한 것을 일본군은 그만큼 가슴 아파 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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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 최고 사령관이 의병을 일으켜?권율은 영의정을 역임한 권철의 아들이지만 46세에야 급제했다. 그러나 권율은 한산 대첩 및 진주 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일컬어지는 행주산성 승리를 이끌었고, 4대 대첩으로 이야기되는 이치 대첩도 이룸으로써 역사에 우뚝 이름을 새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권율은 직책이 없었다. 직전까지 의주 목사였지만 제대로 행정을 살피지 못한다는 유언비어에 휩쓸려 자리에서 쫓겨난 신세였다. 전쟁이 터지자 조정은 권율을 광주 목사에 임명했다. 직책 없던 권율을 광주 목사(정3품) 자리에 앉힌 것은 정읍 현감(종6품)에 불과하던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정3품)로 파격 승진시킨 일 만큼이나 조선의 행운이 되었다.
같은 날 일본군을 대파하는 권율과 이순신광주 목사 권율은 1592년 7월 8일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서 전북 완주군 운주면으로 넘어가는 이치에서 일본군을 무찔러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 패전으로 일본군은 전라도를 점령함으로써 군량미를 확보하려던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권율은 이치 대첩의 공로를 인정받아 전라 감사(종2품)가 되었다.
같은 날 한산도 바다에서는 이순신의 수군이 일본 전함 66척을 부수는 대첩을 이루었다. 그해 10월 5일에는 김시민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이 진주 대첩의 쾌거를 이루었다.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의 경상우도 의병들도 낙동강 주변에서 일본군을 연파했다. 덕분에 호남 일원은 1592년 당시 일본군에게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