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신경 쇠약 직전의 여자> 포스터
영화 <신경 쇠약 직전의 여자>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는 다른 페드로의 영화보다도 코미디적 성격이 두드러져 유쾌하기 보기 좋은데 다만, 온갖 멜로와 자기의 욕망을 따라 신경질적으로 움직이는 등장 인물간의 복잡한 관계에서 나오는 웃음은 취향에 따라 재미있기도, 짜증이 나기도 한다. 이 영화도 페드로의 다른 영화들처럼 여자들이 주된 등장인물, 주인공 페파는 나이차가 꽤 나는 연상의 동료 이반과 연애를 하다 일주일 전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았다.
"얼마나 많은 남자를 잊어버려야했지?"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여자들의 수 만큼."
"가지마."
"난 꼼짝도 안했어."
"나에게 무슨 좋은 얘기를 해줘."
"무슨 얘기?"
"거짓말을, 나를 영원히 기다려왔다고 말해줘."
"항상 당신을 기다려 왔어."
"내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죽었을 거라 말해줘."
"당신이 돌아오지 않았으면 죽었을 거야."
"나만큼 당신도 나를 사랑한다고 얘기해줘."
"당신만큼 나도 당신을 사랑해."
"고마워, 정말 고마워."이반과 페파는 성우로 영화의 남녀 주인공을 각각 맡아 더빙을 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돌아와 사랑을 이야기 하지만, 현실에서 이반은 페파의 연락을 피할 뿐이다. 영화는 이반이 왜 갑자기 페파에게 이별을 고했는지, 페파는 왜 그렇게 이별을 고한 이반에게 집착하며 전화를 하려고 하는지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채 연인과의 이별로 온 신경이 연인에게 쏠린, 신경 쇠약 직전의 페파의 행동을 따라간다.
"전 그걸 꺼내 입는 게 좋아요.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거든요."
"시간은 멈추지 않아!"이반은 바람둥이의 전형, 페파 외에도 그에게 상처 받은 여자는 또 있다. 이반의 전 부인 루시아는 이반과의 이혼의 충격으로 정신병원에 오랜 세월 입원한 뒤 퇴원해 이반에게 다시 집착을 하며 페파를 미워한다. 하지만 페파도 이반과 헤어진 상황, 이반과 함께 살던 아파트에서 이반의 흔적을 견딜 수 없어 하며 세를 낸다.
"이제 좋은 일은 지겨워! 이젠 모두 없애버릴 거야, 그리고 당신도."이반과 함께 자던 침대에 불을 지르고, 이반의 짐을 정리하면서도 동시에 이반의 전화를 기다리고 이반과 만나기 위해 쫓아다니는 페파, 그야말로 신경 쇠약 직전의 모습이다. 관객들은 '저 여자가 왜 저러지?' 싶을 수 있지만, 생각해보면 동거까지 하던 애인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전화 메시지로 "나는 떠날 테니 짐을 챙겨줘라"라고 한다면 미치지 않을 재간이 있겠는가?
그 와중에 세를 놓은 아파트에 방을 보러 온 것은 하필 이반의 아들(아주 젊은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아들로 나오는데 지금과는 달리 느끼함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풋풋한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다)과 약혼자 커플, 그리고 사랑에 눈이 멀어 테러리스트 그룹과 엮여버린 '칸델라'라는 젊은 여자까지 아파트로 찾아오며 상황은 점점 아수라장이 된다.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지?
"아뇨 당신은 잠이 모자라서 신경이 예민해졌어요."
"이반은 나에게 아무것도 얘기해주지 않았어. 인정도 안하고 비난도 안하고 그가 속이는 걸 내가 몰랐다고 생각하니? 아니 알고 있었어 하지만 참고 있었어, 그래서 그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 거짓말하지 말라고 사정했고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얘기하라고 했지. 결국 지난 주에, 결국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지. 그건 꼭 이빨을 뽑는 것 같았어. 당신 아버지와는 달리 내 얘길 들어줘서 고마워. 그이 전화를 기다리는 건 전화선으로 목을 죄는 것 같아."갑자기 떠난 남자와 그를 잊지 못하는 여자들이반의 아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토로하는 페파, 그 와중에 칸델라는 페파의 아파트에서 자살소동을 벌이고 페파는 칸델라의 상황을 해결해 주겠다며 여성인권변호사인 폴리나를 찾아간다. 하지만 폴리나의 사무실을 찾아가고 알게된 사실, 이반의 새 애인이 바로 폴리나였던 것.
"당신이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정말 비참하군요. 왜 내가 당신의 마음을 바꾸려고 하는 것일까? 행복하세요, 내 사랑. 당신이 내게 준 사랑을 잊지 못한다는 게 비참해요."페파의 심경을 대변하는 노래가 흐르고 상황은 점점 미쳐 날뛰는 사이 이반을 찾으러 온 전 부인 루시아와 칸델라를 잡으러 온 경찰까지 아파트에 들이닥친다. 페파는 신경안정제를 갈아 넣은 가스파초를 그들 모두에게 나눠주고, 가스파초를 받아 마신 이들은 하나 둘 쓰러져 잠이 든다. 루시아와 페파만 빼고.
"정신병동에 있으면서 이반을 잊었지만 어느 날 TV속 이반의 목소리를 듣고 다시 생각이 나버렸어. 난 그 사람을 죽여야만 그 사람을 잊을 수 있어."이반과 새 애인이 여행을 떠나러 공항으로 갔다는 사실을 안 루시아는 총을 들고 이반을 죽이러가고, 페파는 그녀를 말리러 따라간다.
"당신이 내 목숨을 구했어."
"내가 원하는 건 당신과 얘기하는 것 뿐이었어요. 난 이틀 동안이나 기다려 왔어요. 당신을 찾아서 메시지도 남기고."
"오늘 저녁엔 얘기할 수 있을거야. 스톡홀롬엔 나중에 가도 돼."
"아뇨, 이젠 너무 늦었어요."
"너무 화내지마. 이제 까페에 가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아니요, 어제... 오늘 아침, 오늘 정오만 해도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이제 너무 늦었어요. 너무 늦은 지 2시간이 지났어요."페파는 그렇게나 이반과 연락하기를 바랐지만 이제는 그를 거절한다. 그 소란스러운 상황들을 겪으며 페파는 이반을 정리했다. 얼핏 영화의 등장인물들을 좌지우지 하는 권력은 이반이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에게 상처를 받은 여성들은 능동적이었다. 격렬하게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부수고 화를 내며 상처받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을 뿐, 그렇기에 마지막의 선택은 페파의 것이다.
페파가 이반에게 그렇게나 전하려던 이야기는 이반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있는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가 혼자 아이를 키우는 새 인생을 준비한다.
"당신이 싸구려 아픔을 가장하려고 무대 위에 선다면 연극할 생각은 말아요. 저는 그 연극을 잘 알아요. 거짓말쟁이. 당신이 그 역에 얼마나 잘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은 그렇게 보일 뿐이에요. 그게 바로 당신이 하던 방식이에요."[씨네밥상 레시피] 스페인 전통 냉 토마토 수프, 가스파쵸 (3인분 분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