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베를린 세계육상선수권 대회 여자 800m 결승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캐스터 세메냐 선수
연합뉴스
남아프리카공화국 여자 국가대표가 선두로 치고 나왔다. 그는 여유 있게 결승선에 안착했다. 웅성거리는 군중들의 목소리를 비집고 미국 <CBS> 방송 중계 아나운서가 외쳤다.
"그녀가 남자처럼 달리고 남자 목소리로 말한다면, 그녀는 남자인 걸까요?"
2009년 8월 19일 베를린 세계육상선수권 대회 여자 800m 결승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캐스터 세메냐는 금메달을 딴 순간부터 '성 정체성' 논란에 시달렸다. 바닥에 깔릴 듯한 목소리, 얼굴에 난 거뭇한 털, 완벽하게 갈라진 어깨 근육은 의심의 표적이 됐다. 승리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남성호르몬 주사를 맞은 것 아니냐고.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은 그에게 성 감별 검사를 요구했다.
검사 결과 그는 '인터섹슈얼(intersexual·양성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남자와 여자의 성별 특성을 모두 지닌 사람. 밖으로 드러난 남성 생식기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자궁과 난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몸속에선 뭇 여성보다 3배 이상 많은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이 나왔다.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은 자체 결론을 내지 않았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2015년 IAAF는 슬그머니 새 규정을 내놨다. 남성호르몬 수치를 잣대로 삼아 여성 종목 출전자를 가려내겠다는 것이었다. "근거가 부족하고 차별의 소지가 있다"며 스포츠중재재판소(CAS)가 제동을 걸어 이 규정은 효력을 잃었다.
'남자가 여자보다 강하다' 편견이 여성 스포츠인의 성취 막아스포츠의 근본 목적은 '불가능 극복'과 '목표 달성'으로 요약된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경쟁을 거쳐 승리를 얻는 데 있다. 스포츠계에서 주로 '강함' '빠름' '공격성' 등 소위 '남성적'이라 불리는 자질이 더 중시되는 이유다.
이와 다르게 여성에게는 '우아함' '아름다움'이란 이미지를 요구하거나, 작고 가녀린 체구를 지닌 여자 선수를 '정상'으로 간주한다. 밑바탕엔 "남성이 여성보다 신체적 여건상 우월하다"는 편향이 깔려 있다. 월등한 기량을 지닐 권리는 남성에게 주어져 있다는 게 그간의 젠더 규범이다.
"남자 운동선수는 '남자답게 행동하라'는 압박을 항상 받고 있습니다. 여성성을 보인다면 남자 운동선수의 능력에 의심을 받게 되죠. 또 여자 운동선수들은 너무 남자같이 굴지 못 하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습니다. 특히 트랜스젠더나 인터섹슈얼 선수들은 항상 의혹과 공포가 어린 시선을 받게 됩니다. 불공평하게 스포츠 경기에서 이득을 보고 있다는 비난도 종종 있지요."
지난 18일 스포츠 분야의 성소수자 인권활동가 케프 세넷이 의문을 제기했다. 이날 서울 중구 주한 캐나다 대사관에서 열린 '성적소수자 커뮤니티를 위한 프라이드하우스 만들기' 강연회 도중 나온 발언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성차별과 호모포비아(homophobia·동성애 혐오)는 여성, 트랜스젠더, 인터섹슈얼 운동선수들의 성취에 제멋대로 한계를 설정하는 역할을 한다"고 지적했다. 전통적인 성별 규범이 운동선수들의 뛰어난 성과를 온전히 평가하지 못하게 막는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취지다.
"농구선수였던 야오밍은 남성입니다. 누구와도 비교되지 못할 만큼 체격이 매우 큰데도, 아무도 그를 두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의심하지 않았지요."우리 스포츠계도 이런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013년 여자 축구선수 박은선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졌다. 그해 시즌 득점왕 박 선수는 키 180㎝, 몸무게 74㎏에 달했다. 건장한 몸에서 강한 경기력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데 한국여자축구연맹 소속 6개 구단에서 박은선 선수를 겨냥해 성별 진단을 요구했다. 여성의 체격이 너무 특출하면 '여성이 아닌 사람'으로 간주돼 집단에서 배제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의 전형이다.
"게이를 죽이겠다"... 선수 생명 위협하는 '커밍아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