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에는 반정부시위를 통제하기 위해 경찰력을 동원하여 시내 요소요소서 불심검문을 자주 행했다. 사진은 80년대 서울시청 길에서의 검문 모습.
민청련동지회
시내 일원에서 계획했던 대학생들의 연합시위는 경찰의 철통같은 경계와 무차별 연행 작전으로 별 성과없이 무산되었다. 종로, 방산시장, 신촌로터리 등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을 뿐이었다. 당시 고대를 중퇴하고 학원에서 다시 입시 준비를 하고 있던 한영수는 애꿎게 걸려들어 구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한영수는 경찰들의 '무분별한' 과잉검속에 항의하다가 괘씸죄로 며칠간 유치장 신세까지 졌다. 이런 인연이 나중에 한영수가 민청련의 열성회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시위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이런 어수선한 상황이 민청련 창립총회를 성사시키는 데는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며칠 전부터 국가안전기획부(약칭 안기부. 중앙정보부의 후신이며 현재의 국가정보원)에서는 재야 청년들이 뭔가 일을 벌이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듯했다. 그래서 요주의 인물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촉각을 세우고 예의주시하던 차였다. 그러나 시간과 장소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학생들의 연합시위 정보가 저들의 관심을 분산시키는 데 일조했으리라.
"예비검속을 피하라!"대회를 준비하는 민청련 집행부는 창립총회를 성사시키는 것만으로도 공개운동단체를 띄우려는 원래 목적을 반은 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회 시간과 장소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보안을 철저히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기부는 30일 이날, 뭔가 새로운 단체를 띄운다는 정보를 입수한 것 같았다. 김근태의 집에 이날 오전에 안기부 요원이 다녀갔던 것이다. 당시에는 예비검속이라 하여 수사기관에서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요주의 인물을 사전에 집이나 특정 장소에 붙들어두는 일이 흔했다. 물론 불법이고, 인권침해였지만 누구도 항의하거나 막을 수 없었다. 김근태 의장 내정자는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여 집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 방문은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게 했다. 아마도 고문이나 지도위원으로 모실 분들에게 연락하는 과정에서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았을까 짐작만 할 뿐이었다.
함석헌 선생, 문익환 목사, 예춘호 선생, 김승훈 신부, 권호경 목사 등 재야인사 30여 명이 이날 오후부터 연금되어 창립대회에 참석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