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
나름북스
이 책은 사람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출범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기획하고, 직업환경의학에 종사하는 의사들이 쓴 책이다. 노동자들이 겪은 산업재해와 직업병을 분석하고, 그들의 근로 환경에 대해 추적하는 책이다. 산업재해 현장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의사들의 이야기다.
"다치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일하자"는 구호는 30년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구호는 아직도 실현되지 않았다. 책의 본문에는 근골격계 질환에 시달리는 급식 조리 종사원들과 메탄올과 수은으로 인해 고통받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채 성년이 되지 않은 어린 나이의 특성화고 현장실습생들조차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책을 쓴 의사들은 번역가인 동시에 탐정이 되어야 했다. 재해 환경을 찾아가서 질병을 의료 용어로 번역하고, 산업재해 뒤에 숨겨진 악화되어가는 근로 환경을 조사해야 했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산업재해를 숨기려고 하는 사업주들 때문에, 노동자와 의사의 적극적인 의지가 없으면 산업재해가 숨겨지는 경우도 많다. 일부 사업주는 노동자가 다쳐도 119 신고를 막기도 한다. 산업재해 처리를 피하기 위해서다.
119에 신고하면 공장에서 다쳤다는 사실이 그대로 서류로 남아 어쩔 수 없이 산업재해 처리를 해야 한다. 이럴 경우 산재보험 요율이 오를 뿐 아니라 발생 빈도가 잦을 경우 노동부의 집중 감독 대상이 된다. 따라서 사업주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산재처리를 회피하고 은폐하려 한다. 심각한 범죄행위다. -120p.이런 편법에 맞서서 숨겨진 관계를 규명하고, 노동자의 증상을 연구해서 질병의 원인을 찾는 것이 이 책의 저자들인 의사들의 일이었다. 탐정들의 기록에는 열악한 작업 환경이 그대로 드러난다. 책에는 메탄올과 수은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있다.
인력 파견업체의 소개를 받아 휴대폰 업체에서 일하던 한 노동자가 갑자기 시력을 잃었다. 정신까지 흐릿해지고, 눈이 침침한 정도를 넘어서 제대로 앞이 보이지 않는다. 사경까지 헤매다가 간신히 살아난다.
노동자를 검사한 직업환경의학과에서는 메탄올 중독이라는 진단을 내린다. 저렴한 가격에 사용하기 위해 에탄올 대신 유해한 메탄올을 사용한 것이 시력 상실로 이어진 것이다. 하청업체들이 단가를 맞추기 위해서 위험한 물질을 사용해서 벌어진 일이다.
수은으로 인한 산업재해는 과거에는 발생하였으나 현재는 어느 정도 사라진 것으로 인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수은 중독에 대한 공식적 보고는 15년 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2015년 한 공장의 철거 현장에서 수은 중독으로 인해 많은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를 당했다. 설비에 수은이 남아 있었는데 위험물질을 완전히 빼내지 않았던 것이다. 철거작업은 안전보건의 사각지대였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철거작업은 안전보건 관리의 공백지대였다. 공장이 가동될 때는 법적으로 안전보건 관리를 해야 하지만, 철거작업은 단기간 작업이고 하청과 재하청을 통해 단기간 일용직을 사용한다. 짧은 기간에 마무리해야 하는 철거 작업에서 다단계 하도급, 비전형적인 업무는 안전보건 관리의 입지를 매우 축소시킨다. - 258p.과로사는 일본에서 온 말이다. 휴일 없이 연속해서 일한 사람에게서 발생한다. 과로가 미덕인 우리나라에서는 굉장히 발생하기 쉬운 문제다. 주말에도 회사에 나오고, 새벽에 퇴근하며 술자리에 참석해야 하는 사람들은 죽음으로 나아갔다. 과로하는 사람을 직장인의 모범으로 그리는 사회에서는 과로사가 없을 수 없었다.
이 과로사를 조사하는 것도 저자들의 일이었다. 직업적 요인으로 사망하게 되어도 흡연을 했다거나 고혈압이 있었다는 이유로 직업병이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직업병 심의 과정에서 호르몬 주기 변화를 일으키는 야간근무의 성격도 제대로 반영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주말에는 쉬어야 하고, 정시 퇴근이 기본인 사회, 휴가를 내는 것이 당연한 사회가 정상으로 인식되어야 죽음의 행렬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요점이다.
산업재해는 어린 학생들에게도 발생하고 있다. 특성화고의 현장 실습생들은 실습을 빙자한 취업을 통해 현장에 투입된다. 이들은 아직 성인도 아니고, 사회 현장에 대한 지식도 부족한 학생들이다. 그러나 근로 현장에서는 수십 시간씩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노동을 해야 한다. 학교는 취업률이 중요하기 때문에 실습생들의 근로 환경에는 관심이 없다. 실습과 관련하여 학교 측에 고용된 취업 지원관들도 비정규직이라 학생을 돌볼 여력이 없다.
이런 환경 속에서 학생들은 제대로 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취업률 상승을 위해 자신의 전공이나 적성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 배치되는 것은 예사다. 특성화고의 경우 취업률이 학교별 성과급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수십 시간씩 일하다가 쓰러지기도 한다. 어린 미성년자들까지 산업재해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책에는 이외에도 감정노동, 석면, 석탄과 관련된 많은 산업재해 사례가 정리되어 있다. 산업재해를 인정받기 위한 의사들의 고군분투도 함께 실려 있다.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들은 노동자의 죽음이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근로 환경에 있었음을 발견하는 일을 한다. 이는 보람있는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일이기도 한다.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노동조건의 처참함을 조사해야 하는데, 알게 된 처참한 노동조건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인의 죽음이 개인적 소인 때문이 아니라 열악한 노동조건과 그 조건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고용관계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것을 밝히는 과정은 무겁기 이를 데 없었다. 조선업, 그것도 하청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상의 위험 요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을 바꿔내지는 못하여 스물셋의 꽃다운 생명이 스러지는 것을 막지 못한 직업환경의학과 의사에게는 그랬다. - 12p책은 이런 현장을 개선하기 위한 대안으로 작업중지권의 적극적인 활용과 사업주의 위험방지의무 위반에 대해 형사처벌하는 중대재해 처벌법 도입을 주장한다. 위험한 상황에서는 노동자들이 작업을 중지할 수 있도록 해야 위험을 피할 수 있고, 또한 사람이 죽어나가는 환경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사업주에 책임을 물어야 근로가 가능한 안전한 환경이 보장되기 때문이란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산업재해와 그 배경의 환경을 고찰하면서, 근본적으로는 이윤을 위해 인간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현실에 대한 성찰도 요구한다. 산업재해 문제는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라는 것이다. 과로가 미덕인 사회, 건강보조식품을 먹고 야근하는 것이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사회가 아닌, 제도와 정치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 많은 부분에서 답답함이 느껴진다. 사건을 그냥 이렇게 처리할 수 있는지 잘 납득이 안 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중금속으로 인한 산업재해와 감정노동, 현장실습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나라에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나쁜 근로 환경에서 산업재해를 겪고도 자신이 산업재해를 당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말이다.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 - 일하다 죽는 사회에 맞서는 직업병 추적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기획,
나름북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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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에서 사고나도 119 안부르는 사장, 이런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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