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이 19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조재연-박정화 대법관 취임식에 참석하고 있다.
이희훈
"대법원장님이 우리 사법부의 마지막 자정의지와 노력을 꺾어 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 추가조사를 추진해온 최한돈 인천지방법원 부장판사가 20일 법원 내부통신망에 글을 올려 양 대법원장의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추가조사 거부를 비판했다. 전날 소속 법원에 사직서를 낸 그가 '판사직에서 물러나면서'란 제목으로 쓴 글에는 이번 사태를 겪으며 느낀 좌절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최 부장판사는 전국법관대표회의(아래 법관회의)에서 '현안조사 소위원장'으로 뽑힌 인물이다.
법원행정처는 지난 3월 판사들의 연구모임 '국제인권법연구회' 활동을 방해하고, 소속 판사들의 성향을 정리해 명단으로 만들었다는 의혹에 휩싸였다. 양 대법원장은 논란이 커지자 이인복 전 대법관을 중심으로 진상조사 위원회를 꾸렸다. 하지만 관련자들의 컴퓨터 등을 조사하지 않은 채 '판사 블랙리스트는 없다'던 진상조사 위원회 결론을 납득할 수 없다는 법원 내 목소리가 커졌다.
판사들은 양 대법원장에게 법관회의 소집을 요구했고, 6월 19일 마침내 회의가 열렸다. 각 법원을 대표해 모인 98명의 판사들은 추가조사가 필요하다는 쪽으로 뜻을 모았고, 이후 양 대법원장에게 의결사항을 전달하며 추가조사를 거듭 촉구했다. 하지만 6월 28일 양 대법원장은 '추가조사 불가'라고 공식 발표했다(관련 기사 :
양승태 대법원장, '판사 블랙리스트 재조사' 끝내 거부 ).
최 부장판사는 "이후에도 대법원장이 법관회의 결의 사항을 수용할 수 있도록 면담 요청을 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여 왔다"며 "7월 13일 (김창보 법원행정처) 차장과 만난 것도 그 일환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7월 20일까지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는 침묵을 고수했다.
"신영철 그 후... 의혹 해소 없는 제도개선은 사상누각"최 부장판사는 "이미 2009년 신영철 전 대법관이 부당한 재판개입에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던 모습을 지켜봤다"며 "8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사법부는 사법행정권이라는 미명 아래 더욱 더 조직화된 형태로 법관들의 자유로운 연구의 자유로운 연구 활동까지 감시당하는 현실 앞에 있다"고 토로했다. 이어 "이번 의혹이 명백히 규명되지 않으면 또 다른 8년 뒤 사법부는 같은 혼란을 되풀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의 제도개선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는 그럼에도 추가조사를 거부하는 양 대법원장을 향해 "제게 마지막 남은 노력을 다하고자 사직서를 제출했다"며 "오로지 대법원장의 입장 변화를 기대하는 한 가닥 희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또 "저의 충정과 올해 초 한 젊은 법관이 그 직을 걸고 지키려 했던 법관의 양심이 대법원장에게 전달돼 여러 의혹을 해소할 조치가 이뤄지길 간절히 염원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의혹과 관련해 법복을 벗겠다는 판사는 더 있다.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 차성안 판사다. 전주지법 법관대표이기도 한 그는 지난 1일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국정조사를 요구하며 자신의 페이스북 등에 "사법부가 블랙리스트 논란을 묻어두고 간다면 판사의 직을 내려놓을지 고민하겠다"고 밝혔다. 6일에는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에 시민들의 관심을 부탁하는 청원글도 올렸다. 20일 여기에는 3만 7000여명이 서명했다(관련 기사 :
현직 판사가 '블랙리스트' 공개 청원... "배수진 치는 심정").
법관회의는 일단 예정대로 7월 24일 2차 회의를 연다. 하지만 84대 14라는 압도적 찬성으로 의결한 추가조사 실시안은 이미 거부당했다.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사표를 꺼낸 판사까지 나왔다. 법관회의 역시 이날 더욱 강경한 대응방안을 내놓을 가능성이 높다. 사법부가 끓어오르고 있다.
다음은 최한돈 부장판사의 글 전문이다.
'법복 벗겠다'는 판사들... 끓어오르는 사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