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정무문>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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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변두리 극장, 2본 동시 상영관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정무문>(精武門, 1973)이라는 영화였지만, 제목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부르스 리, 이소룡을 만났다. 바야흐로 이 땅에는 새마을운동으로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가 난무했지만, 여전히 보릿고개 넘기가 힘들었던 시기였다.
머리에 기계독이 오른 까까머리 중학생, 여드름투성이의 고등학생들은 저마다 2편 동시 상영관으로 몰려갔다. 당시만 해도 소위 개봉관에 학생들이 출입하는 건 자유롭지 못했기에, 동시 상영관이나 쇼도 보고 영화도 보는 극장은 학생들의 핫플레이스였다. 더군다나 이소룡의 영화는 미성년자 입장불가 딱지가 붙은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150원만 내면, 매일 체육 선생에게 얻어터지고 지긋지긋한 수학 공식을 외워야 했던 현실에서 잠시라도 탈출할 수 있었다. (중략)
'미성년자 입장불가였던 이소룡의 영화를 보기 위해 아빠의 모자와 바바리코트는 필수였다'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의 감독 유하는 그의 책 <이소룡 세대에게 바친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서투른 쌍절봉 돌리기로 붕붕거리던 추억의 한때, 그 쌍절곤 덕분에 하루도 뒤통수가 성할 날이 없었다. 이소룡처럼 살고 싶다는 욕망. 과장되게 말하자면 그 욕망이 내 교복의 나날을 견디게 해줬다.' - 오광수, <낭만 광대 전성시대> 중 발췌
갈라지고, 끊어지고, 잡티 많은 '그때 그 영화'그랬다. 춥고 배고팠던 시절, 이소룡 영화는 청춘들의 유일한 판타지이자 힘겨운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해방구였다. 이소룡의 폭발적인 명성과는 달리, 화질은 개봉 때 맞춰서 가야 기대할 수 있었다. 혹시라도 보름 뒤에 가면 영사기에 걸린 필름이 닳아 스크린에 비가 내리는 건 흔한 일이었다.
갈라지고, 끊어지고, 잡티가 난무하고, 음영도 없이 입혀진 자막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엔딩 크레딧(영상 매체에서 엔딩 뒤에 나오는 출연진, 제작진의 이름 목록) 잘라먹는 일도 예사였다.
어디 그뿐인가. 화질도 화질이지만 음향은 진심으로 '엉망'이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지방에 사운드 좋은 극장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냥 배경음악이나 목소리는 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영사기 필름이 끊기면 기약 없이 다시 시작되기만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래도 그 기다림은 행복한 고민이었다.
'이소룡' 그리고 '경아'와 '영자'로 대표되며, 우리 영화산업을 발전시킨 역사에서 영사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원동력이었다. 스크린에 비친 이소룡에게 열광하던 그 까까머리 세대(베이비붐 세대)는 산업사회 역군으로 제구실을 다하고 서서히 은퇴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극장의 영사기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다.
이젠 LED로 영화 본다지만, '아날로그 감성' 채울 순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