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 저격 장면. 서울 남산의 안중근기념관 마당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국권 상실 뒤에 엄귀비는 데라우치 총독을 상대로 이토 히로부미의 약속을 누차 상기시켰다. 만나게 해주지 않는 이유가 무어냐고 따진 것이다. <대한제국 황실비사>에 따르면 데라우치가 귀찮아 할 정도로 엄귀비는 물고 늘어졌다. 심지어는 말다툼도 있었다. 덕수궁에서 벌어진 이 다툼을 <대한제국 황실비사>를 근거로 대화 내용 형식으로 구성했다. 아래의 지문과 대화는 이 책에 근거한 것이다.
데라우치: 요즘 왕세자님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학업도 순조롭고요. 조만간 홋카이도 여행도 다녀오실 겁니다. 엄귀비: 각하, 그렇다면 세자를 왜 귀국시키지 않습니까? 예전에 이토 히로부미 공작님께서는 세자를 1년에 한번은 귀국시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총독은 이걸 모르시는 건가요? 아니면 알면서도 실행하시지 않는 건가요? 부모자식의 정은 누구나 다 같을 겁니다.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 주세요. 너무 무정한 처사가 아닌가요?데라우치: (담배를 피우다가 갑자기 화난 얼굴로) 그건 오해입니다! 왕세자를 귀국시키지 않는 것은 중요한 학업 때문입니다. 언젠간 학업이 끝나면 반드시 귀국하실 겁니다. 좀더 기다려보세요. 엄귀비: (쏘아보며) 홋카이도 여행을 다녀올 시간이 있다면 조선에 못 올 이유가 있습니까? 부디 귀국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이토 공작님의 약속을 생각해서라도요. 그리고 인정을 봐서라도요. 데라우치: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의자를 박차고 나간다.)이 일이 있은 뒤에도 엄귀비는 계속해서 데라우치를 괴롭혔다. 견디다 못한 총독부가 생각해낸 방법은 영친왕의 일상을 엄귀비한테 직접 보여주는 것이었다. 동영상을 찍어 보여주자는 아이디어를 짜낸 것이다. 영친왕을 귀국시킬 마음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때가 1911년 7월 17일경이었다. 엄귀비는 58세였다.
동영상으로라도 아들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엄귀비는 잠시 기뻤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동영상 앞에 앉았겠지만, 이내 가슴이 찢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동영상에 슬픈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친왕의 약혼녀 민갑완의 회고록인 <백년 한>에 따르면, 동영상은 영친왕의 하루 일과에 대한 것이었다. 열다섯 살 된 영친왕이 아침에 기상하고 집안을 청소하고 학교에 가고 군사훈련을 받는 장면이었다. 그중에 영친왕이 훌쩍이는 장면이 있었다. 군사훈련 중에 도시락을 먹다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이 지나가자 엄귀비는 "저 장면 다시 보여줘요"라며 "아니, 세상에 우리 태자님이 저게 웬말이야?"라며 그 장면을 반복해 시청했다. 일본은 고약했다. 하필이면 그런 장면을 골라 아이의 엄마한테 보여줬던 것이다.
이국땅으로 끌려간 아들이 도시락 먹으며 우는 장면을 엄귀비는 반복해서 시청했다. 결국 그 때문에 울음을 터뜨리고, 자리에 몸져눕고 말았다. 그렇게 3일간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숨이 멎고 말았다. 1911년 7월 20일이었다. 오매불망 아들만 기다리던 엄마는 그렇게 아들 얼굴도 못 본 채 눈을 감고 말았다.
엄귀비가 숨진 뒤에야 영친왕은 일시 귀국할 수 있었다. 1907년 12월의 이별이 두 모자의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만 것이다. 일본이 보여준 문제의 동영상은 이렇게 조선왕실의 두 모자한테 가슴을 찢는 상처를 안겨주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2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오마이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냉탕과 온탕을 오갑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