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 평전>,이기형 저,실천문학사
실천문학사
여운형은 1886년 경기도 양평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여운형의 집안은 동학과 인연이 깊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 작은아버지가 모두 동학당이었다.
할아버지 여규신은 동학 창시자인 수월 최제우와 교류했으며, 작은아버지 여승현은 갑오년 동학운동에 참가했다. 특히 동학의 최고 경전으로 꼽히는 <용담유사>를 발행한 곳이 작은할아버지 여규덕의 집일 정도로, 작은할아버지 여규덕은 동학의 핵심 일원이었다.
그런 집안 환경 덕에 여운형은 양반이었음에도 신분제에 얽매이지 않는 평등적 사고를 기를 수 있었다. 또 어려서는 한학을 수학했지만, 민영환이 세운 흥화학교와 중국 금릉대학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1918년, 여운형은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서른 세 살의 나이로 항일운동 조직인 신한청년당을 창당한 그는 이후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의정원 의원과 오늘날의 외교부 차관 격에 해당하는 외무부 차장을 맡았다.
이 해 여운형 삶에서 큰 사건이 발생하는데, 삼일운동 직후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던 일본정부가 여운형을 도쿄로 초청한 것이다. 임시정부에서 명망이 높았던 여운형을 설득해 기존의 항일운동을 보다 온건한 자치운동으로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여운형의 도쿄행에 대해 임시정부 내에서 찬반이 분분했으나, 안창호의 지지를 받은 여운형은 언론과 행동의 자유를 보장을 조건으로 도쿄행을 결정했다. 도쿄에서 일본의 장관, 육군대신, 정무총감 등을 만난 여운형은, 일제 치하에서 자치권을 보장받는 게 조선에도 이롭다는 일제의 주장을 요목조목 반박했다. 그의 논리에 감화를 받은 일본 장관이 '여운형 만세'를 외칠 정도였다.
담화를 마친 여운형은 곧바로 도쿄 제국호텔에서 기습 기자회견을 기획한다. 일본인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특파원 약 5백명이 모인 자리에서 여운형이 대한 독립의 당위성을 주제로 일장연설을 벌인 것이다.
'일본 조야 정계는 발칵 뒤집혔다. 일본 의회 귀족원과 중의원, 대의원들은 논란과 물의로 수일간 일대 공방전을 벌였다. 이 연설로 몽양은 하룻밤 사이에 국제적 인물로 부상되었으며, 그의 명성을 더욱 높아졌다.' -135p.삼일운동으로 폭발한 조선 사람들의 분노를 체제 안에서의 자치운동으로 전환시키고자, 도쿄로 여운형을 초청했던 일본을, 여운형이 도리어 역이용한 것이다. 일본이 여운형으로 하여금 수도 한복판에서 세계 각국을 상대로 자국의 만용과 조선이 독립의 당위성을 연설할 기회를 준 셈이다.
그럼에도 사전에 언론의 자유를 약속했던 터라 일본은 여운형을 처벌할 수 없었다. 무사히 상해로 돌아온 여운형은 더욱 활발하게 항일, 반제운동에 매진한다. 이때 쑨원, 마오쩌둥, 레닌, 호치민 등과 교류, 원조를 받기도 한다.
이후 여운형은 항일운동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돼 3년형을 살게 된다. 복역 후 여운형은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을 맡아 언론을 통한 국내 항일운동에 매진한다. 그러나 얼마 못가 총독부에 의해 신문이 폐간되고 중일전쟁이 터져 일제의 말살 정책이 점차 심화되자, 국내를 떠나 일본으로 간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여운형은 일본 고위층, 지식인들을 만나며 정보를 얻고 동향을 살폈다. 여운형은 머지않아 일제가 항복할 것임을 예측하고 조심스럽게 해방 후를 준비했다. 라디오를 듣지 못했던 대부분의 일반 민중들이 해방 당일까지도 해방을 몰랐던 것은 물론, 해외 독립운동가들한테서도 해방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여운형의 판단은 매우 앞선 것이었다.
해방 후 국내로 돌아온 여운형은 건국준비원회를 발족시켜 일본총독부로부터 행정와 치안을 인수받는다. 이를 통해 해방 후의 혼란을 방지하고 안정을 도모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미군정은 건준을 인정하지 않는 등 여운형을 배척했다. 좌파였던 그의 경력과 친일 세력들의 모함 탓이었다.
이후 모스크바3상회의 결과를 국내 언론이 오보하는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터지면서, 좌우 대립은 더욱 심화된다. 남쪽에 미군이 주둔하고 북쪽에서는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진영 간에 백색테러가 난무하고 이는 남북이 분단될 기미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 막기 위해 1946년 7월, 중도좌파였던 여운형은 중도우파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위원회를 조직한다. 이 기간에 여운형은 미군정과 협상하고 김일성을 만나 설득하는 등 민족 분단을 막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마저 좌우 양극단 세력에 의해 난관에 부딪히고 좌우합작위원회도 힘을 잃게 된다.
이에 지친 여운형은 정계를 떠나 잠시 고향 양평에 은거하지만,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는 등 급박한 상황에 임박하자, 다시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여 좌우 중간파를 결합하고자 한다. 하지만 창당 2달여 뒤인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타리 자가용 안에서 괴한의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니, 그의 나이 62세였다.
우리가 여운형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