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참정권 집회에 참여한 부천 청소년내가 소속한 '부천청소년단체설립준비위원회 세움'의 회원들이 5.11 대선일에 진행된 청소년 참정권 집회에 참여했다.
이계은
이를테면 청소년이 부정적인 행동을 할 때 '애잖아'라는 말로 한 사람에 대한 고민과 상상력을 중단했으며, 긍정적으로 쓰더라도 동등한 주체인 사람을 뭔가 '우쭈쭈' 한다는 느낌이 들어 편치 않았다. 이어서 합리적인 의문이 들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공식적인 회의 석상에서 '회원(들)'이라는 적당하고도 정당한 용어가 있는데도, 지금껏 나는 왜 '아이(들)'라는 말을 써왔지? 청소년을 주체라고 믿는 나 자신조차도 익숙하고 편하다는 이유로 별다른 고민 없이 기존 사회가 쓰는 편견이 담긴 언어를 사용해왔던 것이다.
우리가 쓰는 '아이들'이라는 말의 뉘앙스는 모 아니면 도로, 이분법적이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이므로 지켜주고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시선, 미성숙하고 충동적이며 책임감이 없다고 얕잡아보는 시선 둘 중 하나다. 이것은 어른이 어린 사람에게 바라는 모습이기도 하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몰라도 되는' 것을 알 때 크게 당황한다. 따라서 '애들은 몰라(도돼)'라는 말의 숨은 뜻은 '애들은 몰라야 한다. 몰랐으면 좋겠다'일 터다.
이렇게 어른들의 입버릇(?)처럼 사용되는 말은 청소년에 대한 편견 드러내기와 무시하기, 게다가 가르치기까지를 동시에 시전하는 화법이다. 결국 어른들은 청소년들과 대화하고 소통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단지 '아이들'이라는 특정 대상으로 규정하고 싶은 것이다.
이 말은 편리하고도 잘 먹힌다. 청소년을 조용히 만들고 싶다면 이 말을 자주 쓰면 된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이런 말을 사용하는 어른들과는 인간적인 대화를 기대하기 어려우며 말을 섞지 않고 침묵하는 편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아이들'을 무시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 우리 사회에 '어린이'라는 세대 구분이 등장하면서 소파 방정환 선생을 중심으로 '어린이 존중하기 운동'이 진행됐다.
애초에 어린이날은 지금처럼 어린이들에게 선물 사주는 날이 아니라 어린이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제고하기 위한 취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따라서 1900년대 어린이날의 구호는 "어린이를 존중해주십시오. 어린이에게 존대말을 사용해 주십시오"였다.
이것은 1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급진적인 생각인 것인가?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