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 말의 승려인 도선국사(827∼898)의 초상화. 고려 태조 왕건의 탄생을 예언하기도 한 도선은 태조 이후 고려 왕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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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배경도 있다. 고려 시대, 태조 왕건은 국가의 쇠망을 막으려고 국토 곳곳에 비보소, 곧 땅의 기가 쇠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절을 세웠고, 무신정권 때는 산천비보도감을 두고 국토의 지형을 살펴 비보를 시행하는 일을 맡겼다. 비보풍수는 과거 우리나라에서 국가 운영 원리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다.
조선 시대에는 어땠을까? 왕실이나 양반뿐 아니라 서민들까지 비보풍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풍수지리를 연구해온 최원석 경상대 인문학부 교수는 "조선 중기 이후 불교가 쇠퇴하고 마을이 형성되면서 살기 좋은 마을 입지를 가꾸는 과정에서 비보가 필요하게 되었다"며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비보풍수가 성행하게 된 실천적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평원이 많은 중국과 달리 대부분 분지로 이루어진 한국의 지형적 배경도 비보풍수에 영향을 미쳤다. 분지는 땅의 한쪽 입구가 열려 있고 좌우의 산이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 대부분이다. 최 교수는 "그런 지형이 바로 비보가 필요한 지형"이라며 "이러한 지형적, 사상적, 역사적, 실천적 배경을 토대로 한국의 풍수에 비보라는 특징이 생겨난 것"이라고 강조했다.
"비보는 풍수의 발전적 사조입니다. 전통적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은 굉장히 제한적인 요건을 갖춰야 하는데, 그런 땅은 사실 1%도 되지 않습니다. 비보풍수는 땅에 의지한 자연적 상태에서의 명당, 그 논리에서 탈출했기 때문에 의미가 큽니다. 자연 의존적인 측면을 벗어난 것이죠. 부족한 땅을 얼마든지 좋은 땅으로 만들어서 활용하게 합니다. 자연의 힘에 사람의 힘을 합쳐서 지속가능한 명당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비보풍수는 과학이다풍수는 흔히 미신으로 치부된다. 이는 풍수가 비과학적인 사상이라는 편견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하지만 한국의 비보풍수는 과학적 기능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가 내앞마을 개호송과 같은 마을 숲이다. 마을 숲은 비보풍수 중에서도 나무를 심어 흉살을 막는 '동수 비보'에 해당하는데, 마을로 불어오는 바람을 숲을 조성해 막거나 송림을 가꾸어 홍수방지와 방풍에 이용하는 것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