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카다니 동굴 안을 둘러보는 탐방단원들
김경준
누카다니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우리가 누카다니 동굴을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일본이 여전히 강제동원 사실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시마 섬과 누카다니 동굴을 운영한 미쓰비시의 경우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조선인 노동력을 이용하는 바람에 손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일본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받아냈다. 이에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몇 년 전부터 미쓰비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지만, 미쓰비시 측이 이에 불복하면서 배상을 받을 길도 요원해진 상황이다.
미쓰비시 동굴 앞에 선 다무라 교수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독일 역시 나치 정권 당시 강제동원을 한 역사가 있지만, 일본과 달리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와 배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독일 정부는 나치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기업들에게도 보상금 마련을 위한 기금 모금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는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희생 위에서 그들이 기업을 설립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그는 또 "요하네스 라우 독일 대통령의 경우 160만 명에 이르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내 사죄하기도 했다"며 "잔학한 역사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고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체코 출신의 프랑스 망명 작가 밀란 쿤데라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누카다니 동굴의 교훈을 요약했다.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일 뿐이다."아쉬웠던 다무라 교수와의 작별누카다니 답사를 끝으로 가나자와에서의 일정도 모두 마무리됐다. 이틀간 우리와 동행하며 현장 강의를 해준 다무라 교수와도 작별한 시간이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조국이 과거 벌인 만행에 대해 피해자인 우리들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진상규명에 앞장서 온 양심적 지식인이었다. 일본인들 대다수가 과거 자신들의 만행을 부정하거나 외면할 것이라는 나의 편견을 깨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와의 짧았던 만남이 너무나도 아쉽게 느껴졌다.
다무라 교수와 헤어진 우리는 신칸센을 타고 도쿄(東京)로 이동했다. 중간에 표를 잃어버리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인 우에노(上野)역에 무사히 도착해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 대형사고를 치다도쿄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일본에서도 장마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비가 온다고 해서 일정을 건너뛰거나 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오늘부터 우리는 도쿄 일대의 독립운동사적지를 탐방할 계획이었다.
일본의 수도인 도쿄는 구한말부터 시작된 조선인 청년들의 대표적인 일본 유학 코스였다. 1918년 말 재일유학생의 총수는 769명인데, 이 중 642명이 도쿄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이광수·최남선·홍명희 역시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한 유학생 1세대에 속했다. 도쿄에 모인 유학생들은 친목 단체를 조직하고 기관지를 발행하며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망국의 설움과 울분으로 가득 차 있던 조선인 유학생들은 마침내 '대형사고'를 친다.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한 뒤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발표한 것이다. 대담하게도 이들은 독립선언 직후 해당 문서들을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언론사 등에 배포하고 유학생 대회를 개최했다. 이른바 '2.8 독립선언'이었다.
이날 독립선언을 주도한 유학생들 대부분이 일경에 의해 체포됐지만, 그 뜨거운 열기는 수그러들 줄 몰랐다. 이튿날인 9일 조선총독부 관할 기숙사에서 80여 명의 학생들이 동맹 퇴사를 결의한 데 이어 12일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제2차 만세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결정적으로 2.8 독립선언은 3월 1일 국내에서 전개되는 3.1혁명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