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호.전영수씨 고공농성 82일 차 장면
금속노조 울산지부 이한별 조직부장
소주 원 샷에 왕소금 안주를 먹던 노동자들고향이 부산인 전영수씨는 학교 공부를 마치고 넥센타이어에 정규직으로 입사했다. 그가 졸업할 즈음 시작된 IMF 외환위기로 인해 한동안 실직자로 살다가 2000년에 어렵게 구한 일자리였다. 일을 하면서 병행하던 사업에 실패하고 3년 만에 다시 실직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2003년 말, 부산 신평 염색공단에 있는 염색공장에 입사를 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실 염색하는 일을 했다.
주야 2교대 근무를 하는 사업장인데, 첫 월급이 70만 원이었다. 최저임금 사업장이었다. 보너스 200%가 있었지만, 주고 싶으면 주고 주기 싫으면 안주는 곳이었다. 20년 된 숙련공이나 부장급 이상의 급여가 200만 원 정도 되었던 기억도 있다. 몸에 해로운 염료를 사용했지만, 마스크와 안전화를 주지 않았고, 작업복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8시에 출근해서 5시에 8시간 근무를 마치고 두 시간 동안 의무 잔업을 했는데, 5시에 퇴근하려면 조퇴계를 내야 했다. 노동자들은 시키는 대로 일만 했다.
"어느 날 퇴근하는데, 공장 근처 작은 가게에 거기서 일하시는 분 두 분이 앉아 계신 걸 봤습니다. 소주 한 병을 절반씩 잔에 나누어서 원 샷을 하고 왕소금 찍어 먹고 가시더라고요. 제 부모님 연배이신데, 그렇게 해서 자식들을 키우셨겠죠. 그리고 그 자식들은 지금 비정규직으로 살고 있을 테고요. 지금도 그렇게 생활하실지도 몰라요. 어쩌면 회사가 없어졌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어디서 생활하실까? 가끔 생각이 납니다. 계란 한 개 소주 안주 한 번 못 사드린 게 지금도 마음 아픕니다."영수씨는 그 당시에 염색 기술자라고 그분들을 무시했던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더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염색공장에서 일하던 전영수씨는 2005년 STX에서 물량팀장을 하던 큰 형이 "1년만 하면 한 달에 300만원 벌 수 있다"고 하는 말에 솔깃해서 STX 하청업체에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조선소와의 질긴 인연이 시작되었고, 그는 도장 전 마지막 공정인 물량팀 건조 공정에서 일을 했다.
"8시에 출근해서 7시까지 일 했어요. 어떨 때는 점심을 못 먹고 일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처음 6~7년 동안은 주말에 거의 쉬어본 적이 없어요. 일요일 날 쉬면 그게 더 이상하더라고요. 그렇게 일하면서 1년을 보냈더니 300만 원 주더라고요. 그땐 뭐가 좋다고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돈은 벌었지만, 몸은 많이 망가졌거든요." 인력이 좌우하는 조선소 현장, 사람으로 인정 못받아전영수씨는 2011년에 울산 미포조선으로 일터를 옮겼다. 역시 하청업체 소속 비정규직이었고, 이곳에서 그는 퇴직금과 연차가 있는 본공으로 일하게 된다. 기존 물량팀에서는 퇴직금 없이 오로지 일당만 받았었다. 미포조선이 단가가 세다는 소문에 기대감을 갖고 갔는데, 이곳 역시 만만치 않게 일이 많았다. 한 달에 평균 300~320시간 정도 일했다. 일하다가 위에서 12.5kg 공구가 떨어져 허벅지와 어깨를 다친 적도 있다. 산재는 생각도 못 했고, 업체관리자가 병원에 데려가서 치료를 받았다. 업체는 치료비는 주지 않고, 일당만 70% 정도 주었다.
"STX에 있을 때, 2주일 동안 7명이 죽은 적도 있었어요. 그런 거 보고 미포에 온 겁니다. STX는 그래도 사람이 죽으면 일은 안 시켰어요. 다른 공정 사고라고 해도 올 스톱 하고 안전교육을 받거나 퇴근을 시켰습니다. 정규직이 죽으면 종일 교육받고, 하청업체 노동자가 죽으면 몇 시간 교육을 받을 때도 있었죠. 근데 미포조선이나 현대중공업은 사람이 죽어도 일을 시킵니다. 작년에 정규직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10분 안전교육을 하고 다시 일 시킨 적도 있어요. 미친 회사입니다. 어떻게 1시간도 아니고 10분 만에... '내가 안 죽어서 다행이다' 그 생각만 하는 거죠. 그런 현장이 너무 싫었습니다."영수씨는 조선소 일은 사람 인력이 좌우한다고 이야기했다. 조선소는 자동차 제조 회사처럼 기계화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사람이 공구를 이용해서 작업해야 한다. 조선소 일은 기계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오직 몸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현장보다 사람 대 사람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인데, 지금은 조선소 노동자들이 사람으로 인정을 못 받고 있잖아요. 일하는 사람의 숙련도가 필요한 곳인데, 기술자를 해고하고 새로운 사람이 그 일을 하게 하니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겁니다." 일이 힘들고 위험하다 보니 한국인들은 기피하는 노동 현장이 되었고, 그 자리를 이주노동자들이 채워가고 있다. 방글라데시, 미얀마, 라오스, 스리랑카, 중국, 베트남, 필리핀, 우즈베키스탄 등 국적도 다양해지고 있다.
"조선소가 글로벌화 되고 다양화 되고 있어요. 최근에는 중국동포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하청업체 물량팀장을 하기도 합니다."관리자로 승진하는 일부 이주노동자들도 있지만, 불법체류나 산업연수 등의 조건을 이용한 차별도 분명 있을 거라고 했다.
비정규직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조선소"그렇게 힘들게 일했던 조선소에 다시 복직해서 일하고 싶으세요?""해야죠... 열심히 일하다가 죽는 현장이 아니라 비정규직이 안전하게 일하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조선소 현장을 만들고 싶습니다. 안전해도 힘든 곳이 조선소에요. 저는 여기서 일하면서 직접적으로 피해 본 적이 없어요. 정말 열심히 일했고, 그래서 최고 단가도 받아봤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벗어날 수 없는 게 눈에 보이더라고요."그것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족쇄와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이었다. 아무 때고 나가라면 나갈 수밖에 없는 하청노동자의 삶이었다. 그는 열심히 일했지만, 결국 그도 법에서 보장된 노동자의 권리인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해고가 되었다. 해고라는 낭떠러지에서 그는 울산 성내삼거리 20m 교각에 오르게 된 것이다.
"하청노동자들은 회사를 믿지 않아요. 고의로 4대 보험을 체납하고, 소득신고도 정확하게 하지 않아요. 연말정산 하는 것 갖고도 장난을 칩니다."전영수씨는 연말정산과 관련하여 동일한 서류를 제출하였음에도 회사에서 한 것과 개인적으로 한 것에 20여만 원 차이가 났던 경험을 들려준다. 영수씨는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하청노동자들 자신의 힘과 이들의 단결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