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저학년을 대상으로 두 어린이와 그에 맞는 옷을 고르게끔 하는 그림 자료. 여성과 남성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동기유발 학습에 쓰였다.
초등성평등연구회
지금의 공교육 현장엔 2015년 교육부가 6억 원을 투입해 연구한 결과물이 있다. '학교 성교육 표준안(지도안 포함)'으로, 성교육의 가이드라인 역할을 지닌다. 학생의 발달단계별로 종합적이고 전반적인 이해가 깃든 성교육을 하겠다는 취지였다.
연구회는 이에 대해 분석 작업을 시행한 바 있다. 인터뷰에 나선 교사들은 이를 두고 "쓰레기"로 규정지었다. 솔리 교사의 호흡이 가빠졌다.
"여성주의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성별 이분법적이고요. 조손가정, 다문화가정, 한부모 가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반복적으로 4인 가족(부모와 두 자녀)이 등장하는 등 '정상가족 신화'를 강화하고 있어요. 성 엄숙주의를 강화하고 있고요, 특히 여성에 대해서만 성적 억압이 심합니다. 게다가 성폭력에 대해선 '피해자 비난'을 하고 있어요."가장 논란이 되는 지점이 성폭력 대목이다. '강간'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는 등 성폭력의 개념을 모호하게 서술한데다, '친구가 원치 않으면 만지지 않는다'는 정도로 언급함으로써 성폭력이 얼마나 나쁜 행위인지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폭력을 피하는 방법만 나올 뿐, 막상 그 일이 닥쳤을 때 피해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재하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이 교사는 "외국에선 성폭력에 직면했을 때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가르친다. 성폭력을 당하지 않는 방법만 가르치면 아이들은 막상 그 상황이 닥쳤을 때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죽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서 교사는 "성폭력을 당한 아이에게서 '내가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내가 싫다고 크게 말했더라면'이라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도록 교육이 짜여 있다. 피해자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아이와 관계 형성이 미약한 아이라면 상대방에게 혼날까봐 두려워서 말을 꺼내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성폭력에 대해 다루면서 성폭력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교육을 하지 않는데, '성교육 표준안'을 제대로 된 교육으로 볼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수업에 앞서 학생들의 동기 유발을 꾀하는 방식도 현실과 매우 동떨어져 있다는 평이다. 이 교사는 음란물 예방 교육 사례를 끄집어냈다. '음'으로 시작하는 단어 말하기, '란'으로 시작하는 단어 말하기, '물'로 시작하는 단어 말하기. 이러한 방식을 권한다는 것이다.
"음악, 란제리, 물총. 세 단어를 주고 공통점이 무엇인지 물어요. '음'으로 시작해요. '란'으로 시작해요. '물'로 시작해요. 정답이 뭘까요. 음란물이랍니다. 일반인이 봐도 웃음이 나올 법한 내용이죠. 굉장히 촌스럽죠. 아무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아요."인체의 생식기를 이해하는 수업도 실소를 금치 못한다. 학생들에게 '고환', '음경' 등의 이름을 붙이고, 서로 공을 주고받는다. 공을 받은 이는 공을 던질 상대에게 인사를 건네야 한단다. "안녕, 고환아?"
이 교사는 "시작하는 순간 교실이 초토화가 될 것"이라며 깔깔거렸다. 솔리 교사는 "남성 성기인 '음경'과 '고환'은 나오면서 '소음순' 같은 여성의 외부 성기는 가르치지 않는다"며 황당하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성관계를 시작하는 평균 연령이 12.8세까지 낮아진 상황(2013~2015년 청소년 건강행태 온라인조사 결과)에서, 표준안은 학생들이 성관계를 맺을 가능성조차 염두에 안 둔다. 교사들은 이른 나이에 성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하되, 어떻게 하면 안전한 성관계를 도모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 교사는 외국의 사례를 들며 운을 뗐다.
"프랑스에서는 '첫 경험에 대해 상상해보기'라는 주제로 저학년에서 수업을 진행하거든요. 그런데 우리 남자아이들 같은 경우는 첫 경험에 대한 이미지를 '야동'을 통해 얻잖아요. 그 이미지는 '분출'이에요. 내가 콘돔을 끼고 사정해서 상대를 이기고 지배하는 거예요. 내가 사내로서 인정받고 남자로서 존경받기 위한 의식으로 돼 있어요. 그런데 첫 경험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 준비 과정을 거쳐 굉장히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경험으로 승화해야 하는 거예요."이 교사도 '어린이들을 성적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 표준안을 비판했다.
"많은 여자들이 첫 경험을 치른 뒤 죄책감을 느껴요. 저는 처음에 '엄마'를 생각했어요. 내가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고 파괴당했다는 느낌인데, 남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여자들은 내 것을 남자에게 줬다, 바쳤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그러면 안되는 거죠.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하는 행위인데, 한 사람은 정복감을 느끼고 다른 한 사람은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게 일반적이라면, 이는 공교육에서 이야기를 해볼 수 있는 주제죠."이들은 성교육 표준안이 하루빨리 폐지돼야 한다는 데 중지를 모았다. 현장 교육을 맡은 이의 자율성을 통제하는 데 쓰인다는 이유에서다. 솔리 교사는 "일선 교육청에서 배포 지침을 내고 '동성애' 언급을 하지 말라고 명시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학생이 '게이냐?'는 말을 했을 때 게이가 놀림거리, 배제할 존재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는 존재이므로 이해해야 한다고 교육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는 셈"이라며 고충을 토로했다.
"'모범생'은 고정관념... 여교사는 술·담배·섹스 못하나?"지난해 5월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여성을 상대로 한 묻지마 살인사건은 단체 결성의 동력이 됐다. 초등교사 온라인 커뮤니티인 '인디스쿨'엔 수업 보조자료가 풍부하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성평등 교육, 특히 개중에서도 사회적 측면에서 문제를 다룬 자료는 없었다. 서 교사가 제안 글을 올렸다. 여성 혐오 정서의 확산, 여성 대상 범죄 증가, 구조적 성차별의 심화와 관련해 교육현장에서 적극적인 성평등 교육이 필요하다고. 함께 할 사람을 찾는다고. 서 교사가 단 글은 삽시간에 조회수 2300건을 넘었다. 대다수가 호응하고 응원을 보냈다.
단체를 결성한 뒤 이따금 언론사와 인터뷰한 기사가 인터넷에 선보였다. 그 다음 날 학교엔 항의전화가 걸려오기 일쑤였다. '맨박스(남성을 둘러싼 고정관념)'에 갇힌 남성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여실히 방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몇몇 남성 교사들이 어깃장을 놓는 것이 가장 뼈 아팠다. 어깨동무하며 우군이 되리라 믿었던 기대가 깨진 순간이었다. '왜 교사가 이런 일을 하죠?', '학생들에게 특정 이념을 주입하는 것 아닌가요?', '아이들의 생각이 자란 뒤에 성평등 교육을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토론 교육 제안, 동화책 쓰기 모임을 제안했을 때도 달리지 않던 비판 댓글들이 눈에 띈 게다.
"기존의 맨박스에 더해 학교 내부에서 남성 교사들이 소수라는 점에서 스스로 느끼는 고통이 얹어져 있기 때문에 굉장히 피해의식을 느끼는 거죠."(솔리 교사)"저는 그래서 더 이해해줄 줄 알았어요. 바깥 사회에선 여성이 소수적 위치에 놓인 성별이고 남성이 주류적 성(性)이라면, 교사집단에선 오히려 남성이 소수적 성(性)이잖아요. 짐을 옮기는 데 동원되거나 때때로 힘든 업무를 맡기도 하니, 여성들이 사회에서 겪는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이 교사)초등학교 교사 열 명 중 여덟 명(76.7%)이 여성이다. 그러나 수적 우위가 젠더 권력의 우위를 뜻하진 않는다. 여전히 이 땅의 여교사들은 기성 사회가 주조한 모델을 따를 것을 요구받는다.
기성세대는 술, 담배, 섹스를 멀리하는, 전형적인 모범생의 이미지를 소환한다. 순응적이고 유약할 거란 예단은 막상 교사가 학생을 엄하게 혼냈을 땐 '여교사답지 않게 학생들을 휘어잡는다'는 평가로 연결된다. 서 교사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여교사는 모순적인 요구를 계속 받아요. 성교육할 땐 섹스에 대해 빠삭하게 꿰고 있어야 돼. 하지만 개인적으론 섹스를 알아선 안 돼. 여교사는 모범적인 인생을 살아왔을 거라 기대하는데, 실제 인생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잖아요. 내 삶을 조각내서 아이들에게 일화로 들려주며 설명을 해요. 그런데 그게 내 삶이 아닌 거예요. 탈권위적이고 평등한 페미니스트로서 약자를 존중하고 싶은데, 이 사회에서 내가 '1인자'로서 권위를 갖지 않으면 오히려 약자를 보호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거든요."가부장제의 규범에 찌든 남성들이 여성을 하대하는 행동은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행하는 권력 행위의 말단이다. 상당수 교사들에겐 일상적 경험이다. 이 교사는 지난해 학교 회계 업무를 맡았다. 급식비 등 학부모들이 대는 각종 비용 처리를 살피다 보니, 자연스레 민원 전화가 끊이질 않는다.
전화를 받을 때 그는 꼭 한 마디를 덧붙였다. "교육의 질 향상을 위하여 모든 통화 내용이 녹취되고 있습니다." 유독 반말로 묻거나 대뜸 욕설부터 하는 민원인들이 많았단다. 올해 그 업무는 남자 교사에게 넘어갔다. 몇 달이 지나 물었다. 나는 민원인들 전화로 스트레스 많이 받았는데, 당신은 그런 것 없냐고. 돌아온 대답에 이 교사가 깜짝 놀랐다. '그런 적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남자가 전화 응대를 하자, 폭언을 하는 민원인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게다.
"성평등교육은 '세상을 바라보는 틀'... 사막에 나무 심는 기분"국책연구기관 '여성정책연구원'에서 지난해 3월 '한국은 누구에게 살기 좋은 나라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결과를 선보였다. 남성 청소년, 대학생, 직장인 집단에서 공통적으로 '2030세대 여성'이 큰 수혜를 보고 있다고 답했다. 이 교사의 표현대로 "자신을 두들겨 팬 대상에게 화를 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옆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격"이었다.
"여자가 좋은 일자리 독차지한다", "여자는 왜 군대 안 가냐", "출산이 벼슬이냐"는 식의 핀잔을 주는 청년들이 눈에 띈다. 여성을 하위의 존재로서 격하시키고, 2등 시민인 양 얕잡아본다. 지금의 어린이들이라고 무사할 것인가. 여성 혐오 문화가 다음 세대에 고스란히 전승될 수 있는데, 두렵지 않은가.
서 교사가 담담하게 말했다. 자신들은 "지고 있다"고. 열심히 가르쳐도 이내 기존의 주류 문화에 포섭돼 다시 성차별적 언행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종종 본다. "너무나 미미해요. 패배의 기록을 지금도 계속 봐요."
하지만 성평등 교육을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틀"로 정의 내린 솔리 교사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들의 활동이 '사막에 나무를 심는 일'과 같다고 밝혔다.
"내가 하는 일이 과연 이 아이의 미래를 얼마나 바꿔 놓을까 하는 의심이 끊임없이 들어요. 사막에 나무를 심어봤자 말라 죽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사막에 나무를 심는 게 선생님들이 하는 교육의 본질이라 생각해요. '내가 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사막이 넓어지지 않은 거야'라고 굳게 되뇌죠."이들이 실천하는 성평등 교육은 어느 범주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솔리 교사의 설명을 듣고 나니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수시로 들춰볼 참고서와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기존에 우리가 옳다고 하는 지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해주고, 억압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해줘요. 나아가 여성의 불평등을 뛰어 넘어 모든 불평등과 연결지어 이야기할 수 있어요. 더 평화적으로, 민주적으로, 동등한 처지에서 인간과 인간이 관계 맺는 방법을 고민하는 거예요."서 교사는 자신을 향해 "매일 실패하는 직업"이라며 혼잣말했다. 그러면서도 "일단 부딪쳐봐야 하는 문제"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프섬 감옥에 갇힌 '에드몽 단테스'는 땅굴을 파서 탈출을 감행하다 옆방의 이웃 죄수 파리아 신부를 만난다. 속내를 털어놓지 못한 이들이 조우했을 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늦은 밤 강남역 10번 출구는 인파로 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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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 기모띠', 선생님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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