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객주상회 단체사진(1907)
동국사
근해 어족자원이 풍부한 군산은 조선 시대부터 어시장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대표적인 포구로 죽성포(째보선창), 경포(설애장터), 궁포(구암포), 월포(달개나루), 서포(서시포), 나포(나리포) 등을 꼽는다. 이곳에 거주하는 객주들은 여각을 운영하며 어부들이 잡아 온 물고기를 위탁받아 매매를 주선하였고, 보부상들은 각 지역의 오일장에 내다 팔았다.
군산은 조선 시대 전라도 7개 고을 세곡을 취급하는 군산창이 있어 객주도 많았다. 이곳 객주들은 군산포, 죽성포, 경포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다수에 따라 시행하라'는 고종황제의 칙령에 의해 1899년 5월 1일 군산이 개항하자 객주 90여 명은 상권을 지키기 위해 순흥사(順興社), 영흥사(永興社), 창성사(昌盛社) 등 각종 상회사(商會社) 설립을 추진하였다.
순흥사는 군산이 개항하던 해(1899) 조직되고, 영흥사는 1900년 설립된다. 1903년 창립된 창성사에는 60여 명의 객주가 참여한다. 당시 <황성신문>은 군산지역 객주들의 활동으로 일본 상인들의 경제침투가 어려웠다고 보도하였다. 군산의 객주들은 을사늑약(1905) 이후 국채보상운동과 교육 사업을 지원하는 등 일제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항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째보선창은 옥구군 죽성리에 속했던 죽성포의 별칭이다. 나지막한 석산(石山) 주위로 흐르는 금강의 지류(일명 세느강)와 대밭이 성(城)처럼 마을을 감싼 모습이어서 '죽성리(竹城里)' 혹은 '대재'라 불렸다 전한다. 이 지역은 봄 안개 자욱한 대나무숲 풍광이 그지없이 아름다워 '군산 팔경'에 들기도 하였다.
째보선창 유래도 사뭇 해학적이다. Y자로 살짝 째진 강안(江岸)에 석축을 쌓아 조성한 포구가 째보(언청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 또 하나는 이곳에 힘센 째보가 살았는데 부둣가에서 날품팔이나 노점을 차리려면 그에게 자릿세를 상납해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째보 객주가 사는 선창이라 하여 부르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째보선창 부근에 있었던 사업체와 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