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박열의 추도식. 이후 박열은 건국훈장에 추서되기까지 대단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박열의사기념관
박열은 사망 후에 푸대접을 받았다. 독립운동가들에게 수여되는 건국훈장에서 제외된 것이다. 어쩌면 사망 당시 박열이 북한 내에서 직책을 맡고 있었기에 그런 것 같다.
그렇다고 박열이 북한 내에서 크게 대우를 받는 것도 아니다. 일본 출신, 그것도 '전향한 반공주의자'를 북한에서 얼마나 대우해줬을까? 그렇게 옛 혁명가는 남과 북에서 모두 외면을 받는가 싶었다.
그럼에도 박열에 대한 발굴은 늦게나마 이루어졌다. 마침내 1989년, 박열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다른 독립운동가에 비하면 늦었지만, 그래도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후 교과서에도 박열이 나오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그를 주제로 삼은 영화도 개봉했다. 하지만 애석한 점도 많다. 박열에 대해서 단순히 사회주의자로만 알려지는 점이다. 효창공원 삼의사묘의 유해송환을 시킨 것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는 단순한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반공주의자도 아니다. 오히려 '애국'을 위해서 그 수단으로 이념을 선택했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그만큼 박열은 단순하지 않은, 정말로 입체적인 인물이다. '파란만장'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애국자다.
혹시라도 박열을 '사회주의 빨갱이'라고 모욕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용히 해방 이후의 행적을 알려주길 바란다. 끝으로 출옥 후에 박열이 남긴 말을 알리고자 한다. 1946년, <신조선혁명론>을 집필하여 남긴 말이다. 박열 선생, 이런 애국자의 삶을 기억하는 것도 후손인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이다.
"나는 사고하고 행동한다. 온몸을 바쳐 온 독립운동의 일꾼으로서 한 병졸로서 일한다. 나의 사상과 행동은 언제나 올바르고 보다 정의로운 것을 지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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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박열>이 다루지 못한, 박열의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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