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뜨거웠다.
연합뉴스
"너희들은 대학 가면 데모하지 마라."그랬으니 6.29 선언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선언이 있고나서 '데모'는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언제 최루가스가 날아들어 눈물 흘렸나 싶었을 정도였다.
때론 그때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6.29 선언 이전이나 이후나 우리나라의 정치적 민주화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대학 가서 데모하지 말라"는 말만 귀에 못이 박히게 했다. 그리고 오로지 대학 진학만이 지상 과제인양 학생들을 다그쳤고, 그래서 1학년 때부터 학교에 밤늦게까지 남아 '자율학습'을 해야 했다. 대학생 형들이 데모라도 해야 집에 일찍 가서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라디오 음악방송을 들으며 여유를 찾을 수 있었으니, 6.29 선언이 때론 원망스럽기도 했다.
6.29의 정치적 의미, 그리고 그 선언이 있기까지의 과정에 눈뜬 건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였다. 대학에서 정치외교를 전공했지만 눈 뜸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원래 문학도를 꿈꿨는데 틀어져서 1~2년 동안은 전공에 도무지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였다. 그러다 학교에서 만난 동기, 선배들과 공부 모임을 하면서 서서히 그 시절의 정치상황에 눈떠 나갔다.
사실 1980년대의 기억은 나쁘지 않다. 학창시절이었고 해서 오히려 그립다. 1980년대를 다룬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면서 그 시절이 생각나 눈물이 핑 돌기도했다. 그러나 그 좋던 시절 이면에 1980년 광주가 있었고, 형제복지원이 있었고, 박종철-이한열 열사가 있었다. 그래서 그때를 돌이켜 보면 한편으로는 그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두환 정권의 폭압정치를 생각하며 몸서리 치곤 한다.
6.29 선언 30년, 다시 원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