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 미술관폐교를 리모델링하여 미술관으로 개조한 아미 미술관에서 학창시절의 추억을 만나다.
문하연
고2가 된 토요일 오후, 학교가 끝나고 친구들과 할 일없이 여수 시내를 쏘다니고 있었다. 갑자기 오토바이가 내 앞을 막았다. 그였다. 그는 나를 만난 게 진심 반가웠는지 환하게 웃으며 맛있는 거 사준다며 근처 음악다방으로 날 데려갔다.
그는 파르페를 권했지만 나는 웬일인지 생전 마시지도 않는 커피를 주문했다. 그는 잠깐 어리둥절한 듯 보였으나 이내 웃으며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커피와 함께 '프림과 설탕이 든 도자기 그릇'이 셋트로 나왔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티스푼을 들고 설탕을 한 숟가락 떴다. 갑자기 수전증이라도 생긴 건지 손이 살짝 떨리더니 의식할수록 스푼에서 설탕이 떨어졌고 내 컵에 도착했을 땐 이미 설탕이 반도 남아있지 않았다. 등에서 식은땀이 나고 고개는 자꾸만 밑으로 향했다.
"이제 어쩌지? 그냥 일어서서 집에 갈까?" 고민하는 순간 그는 내 커피 잔에 설탕 두 스푼과 프림 두 스푼을 넣고 저어주며 "오빠는 학교 잘 다니지? 대학 다니니깐 좋대?"라고 말했다.
나는 얼떨결에 그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했지만 무슨 얘길했는지 기억이 없다. 그저 내 맘을 들킨 거 같아 창피하고 빨리 그 자릴 뜨고 싶었다. 내가 우물쭈물하자 그는 빨리 마시고 일어나자고 했고 나는 손이 떨릴까 봐 잔을 들고 마실 수가 없었다. 다행히 그가 화장실에 갔고 나는 커피를 원샷했다.
그는 오랜만에 우리 엄마께 인사도 드릴 겸 날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나는 괜찬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그는 나를 끌어다 오토바이 뒤에 앉혔다. "꽉잡아" 그가 말했다. 나는 어딜 잡아야하는 지 몰라서 그의 셔츠 자락을 손 끝으로 쥐었다.
오토바이가 출발과 동시에 관성의 법칙에 의해 나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오토바이에서 떨어진 그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가 달려왔고 내 손바닥에서 피가 났다. 그는 유치원아이 살피듯 나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다친 데가 있는지 살폈다. 나는 아프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복잡한 마음에 눈물이 났다.
그는 "아이구... 그러게 오빠가 꽉 잡으라고 했잖아. 빨리 다시 타." 그는 다시 나를 뒤에 앉힌 후, 내 양팔을 끌어다 자기의 허리를 꽉 감게 했다. 그의 등과 내 가슴이 밀착되자 창피함은 사라지고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내 심장소리가 그의 등을 타고 가 그에게 전해 질까봐 최대한 가슴을 뒤로 빼고 앉았다.
신호에 걸려 멈출 때마다 그는 내 손을 더 끌어다 놓으며 "또 떨어지니깐 조심해"라고 말했고, 나는 우리 집이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어디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 깜짝할 사이 그가 날 집 앞에 내려주고 갔다. 이것이 그와 나의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우리 집은 광주로 이사를 했고 나도 전학을 갔다. 오빠에게 듣기로는 그는 고2때 자퇴를 하고 이미 누군가와 동거하고 있었다고 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고 난 그를 차츰 잊었다.
지난 달 아버지 생신에 우리 가족이 다 모였다. 얘기 끝에 우연히 그의 얘기가 나왔다. 아직 비혼인 오빠는 "누구는 한 번도 못해본 결혼을 그는 세 번이나 했다"며 진심 부러워 했다. 결혼 전 동거까지 합하면 "그는 무려 5명의 여자랑 살아봤다"며 "그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야"라고 말했다. 오빠는 여한이 많아 보였다.
언니는 학창시절 "그가 언니에게 고백했던 얘길" 하며 "동생 대하듯 잘 타일렀었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척 듣고만 있었다.
내가 만일 그와 계속 연락하며 지냈다면 나는 다섯 여인들 중의 하나가 되었을까? 그도 어설픈 나의 마음을 알아챘을까? 그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 끝에 오토바이에서 떨어진 일이 기억나서 오빠한테 말했다. 물론 그때 내가 가졌던 감정은 쏙 빼고 팩트만 말했다. 오빠는 박장대소하였고 오빠의 웃음 속에 어리버리하고 순수했던 내가 보여 같이 웃었다.
오빠 말에 의하면 그는 부모님께 받은 유산으로 지금까지 변변한 직장 없이도 잘 살고 있다고 한다. 한 사람과 지지고 볶고 20년을 넘게 살면서 때때로 일탈을 꿈꿨던 나보다, 다섯사람과 살아본 그는 더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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