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가 사용 중인 컴퓨터. 퀴어, 페미니스트 관련 스티커들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한 눈에 보여준다.
변지은
어릴 때부터 과학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래서 공대에 입학했다. 남자의 모습이었다. 학부를 졸업하고 바로 건설회사에 취직했다. 이번에도 남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회사에 다니면서 점점 남자로 '연기'하며 살기 힘들었다. 변호사 박한희씨 이야기다.
"남자 정장을 입고 회사생활을 2년 하니까 생활하는 거 자체가 힘들기도 했고, 둘째로는 내가 혹시라도 회사에서 아우팅(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을 본인 동의 없이 밝히는 것)을 당해서 어떤 불이익을 겪어도 사기업에선 잘리면 그만이니까 전문 자격증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기왕 전문직 공부할 거면 저 같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자격증을 찾아보자 싶었고 정신과 의사랑 변호사 두 가지를 생각하다가 의대는 위계도 심하고 변호사가 더 적성에 맞을 것 같아서 로스쿨을 택했죠. 성소수자들 중에 저 같은 이유로 로스쿨에 가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인터뷰 당시 한희는 변호사시험 합격 결과를 기다리는 로스쿨 졸업생 신분이었다. 지금은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트랜스젠더의 일자리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생각해보라. 크로스드레서(사회적으로 다른 성별이 입는 옷을 착용하는 행위)가 아닌 남성이 매일 치마를 입고 스타킹과 하이힐을 신고 출근해야 한다면 어떻겠는가? 부치(Butch, 복장·말투·몸짓 등에서 소위 남성적인 방식으로 성별 표현을 하고 이를 편안하게 느끼는 레즈비언)가 아닌 여성이 짧은 머리에 넥타이를 매고 출근해야 한다면? 게다가 볼일을 볼 때마다 남자 화장실로 가야 한다면 그의 심정이 어떨까. 한희는 트랜스젠더들이 회사 생활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 화장실 이용과 복장 규정이라고 했다.
또한 트랜스젠더들은 구직 과정에서부터 차별을 겪는다. 트랜지션(성전환 시술이나 수술을 받는 것)을 한다고 해도 주민등록번호 앞자리가 바뀌지 않는 한 채용과정에서 '왜 주민등록번호와 생김새가 다르냐'며 차별받고, 결국 탈락한다.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신분증이 필요 없는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요. 트랜스여성 중에 유흥업 종사자가 많은 이유도 여성으로 대우받으며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기 때문이에요. 아니면 입사할 때부터 커밍아웃하고 입사하거나, 속이고 입사해서 호르몬을 맞기 시작하는 거죠. 주중엔 회사원으로 살고 주말엔 커뮤니티에 놀러 다니고요. 나이 있으신 분 중엔 자영업 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내가 사장이니까 눈치를 안 봐도 되는 게 큰 장점이죠."지금 이 순간에도 트랜스젠더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채용 과정에서, 일상 속에서 차별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성적지향·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 2014)에 따르면 한 트랜스젠더는 구직 활동 중 자기소개서에 트랜스젠더임을 밝혔는데 면접을 보러 갔더니 면접관이 "트랜스젠더가 뭔지 궁금해서 불러봤다"라고 말하고 떨어뜨린 경우도 있다. 또 업계가 좁은 경우엔 아우팅을 시켜 이직하지 못하게 막는 경우도 있다.
"자기 성별의 화장실을 못 쓴다고 생각해보세요. 다른 직원들이 불편해하니까 우리 층, 우리 건물의 화장실은 쓰지 말라고 대놓고 말하는 회사가 많아요. 1박 2일 사내워크숍을 갈 때도 그래요. 남자 방, 여자 방으로 나누는데 트랜스여성을 남자 방에 넣는다거나 하는 식이죠."커밍아웃을 앞둔 트랜스젠더의 딜레마"저 같은 경우 처음 커밍아웃하려고 할 때 고민한 게 있어요. 보통 트랜스젠더들은 어릴 때 성별을 정정하고 커밍아웃하면 성별정정 전의 경력은 다 지워버려요. 수술과 성별 정정을 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는 거죠. 처음부터 시스젠더(신체적 성별과 본인이 정체화하고 있는 성별이 일치하는 사람) 여자였던 것처럼 혹은 남자였던 것처럼요. 저는 28살 때까지 회사에 다니다가 29살에 로스쿨에 입학했는데 제가 그렇게 하면 30살에 경력 없는 여자가 되는 거예요. 그건 굶어 죽으란 소리나 마찬가지니까 결국 그렇게는 커밍아웃을 하지 못하고 트랜스여성으로 커밍아웃하게 됐죠."트랜스젠더 대부분은 20대 때 첫 커밍아웃을 한다. 트랜지션을 위한 비용을 모으는 데 평균적으로 2~3년이 필요하다. 트랜지션 이후 과거를 지우는 삶을 택한다면 경력단절을 겪고, 과거를 지우지 않고 트랜스젠더임을 밝히면 차별이 돌아온다.
게다가 트랜스여성은 트랜스남성보다 외모 기준이 더 크게 작용한다.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더 쉽게, 자주 성적 대상화되기 때문이다. 한희는 "트랜스 여성의 외모가 예쁠 경우 '진짜 여자 같다' '여자보다 더 예쁘다'라는 말을 듣는다"며 "심지어 트랜지션 후의 외모가 예쁘지 않다면 '어떻게 저러면서 여자라고 할 수 있냐'는 말을 듣기도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