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武毅公收復東都碑<박무의공(박의장) 수복 동도(경주) 비>는 경주 황성공원에 있다. 높이 2.3m, 폭 89cm, 두께 34cm로, 1861년(철종 12)에 세워졌다. 안내판은 박의장(朴毅長, 1555∼1615)이 1577년(선조 10) 무과에 급제했고, 경주판관으로 있으면서 이장손의 비격진천뢰를 이용하여 경주성 탈환에 큰 공을 세웠으며, 7년 동안이나 경주에서 왜적을 막아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해설은 박의장이 그 공로로 경상좌도 병사가 되었고, 세상을 뜨자 무의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는 내용도 덧붙이고 있다.
정만진
최효식의 『경주부의 임진 항쟁사』도 '경주읍 탈환 전투는 9월 7일 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왜군이 성을 버리고 간 후 관군이 9월 8일 늦은 밤에 입성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입성 공략 작전은 경주부 절제도위 박의장에 의해 주도되었다.'라고 말한다.
최효식은 경주 의병장 손엽이 자신의 『용사일기』 1592년 9월 8일자에 '(강동면 양동리 313) 수운정에서 잤다. 밤중에 경주 읍내를 바라보니, 성 안에 불길이 하늘에 닿았다가 날이 샐 무렵 꺼졌다.'면서 '병사(박진)는 2∼3일 전에 관찰사에게 갔다.'라고 기록한 것을 근거로 든다. 최효식은 '경주에는 좌병사가 부재 중이었다는 사실을 (손엽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라고 해석한다.
경주성 탈환의 주역은 박의장이었다김강식은 논문의 '맺음말'에서 '2차 경주성 복성 전투는 경주부 판관 박의장이 담당하였는데, 의병진과 합세하여 소수 정예를 투입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장손이 발명한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1592년 9월 8일 (1592년 4월 21일 빼앗긴 지) 130여 일 만에 경주성 복성에 성공하였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이로써 경상좌도를 회복하여 조선군의 사기가 진작되었으며, 일본군의 전략전술에 있어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사실상 일본군의 보급로 역할을 하던 동로(東路)를 상실한 일본군은 울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경상좌도 전체의 전세 변화에도 커다란 기폭제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최효식의 결론도 비슷하다. 최효식은 '경주읍성이 왜적에게 함몰된 지 100여 일만에 탈환된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면서 '읍성 탈환은 영천, 안동으로 통하고, 언양과 울산 간의 적의 교통망을 차단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따라서 경상도 북방의 대부분이 수복되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서생포 방면의 왜군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왜군은 바다를 통해서 겨우 낙동강 서안(서쪽 언덕) 지역을 연락선으로 삼게 되었던 것'이라고 진단한다.
지금까지 경주성을 빼앗긴 1592년 4월 21일, 되찾기 위해 수복 전투를 벌인 1592년 8월 20일과 1592년 9월 7∼8일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직도 풀리지 아니한 의문점이 남아 있다. 어째서 이장손이 만든 비격진천뢰 제작 기술은 후대에 전해지지 않았을까? 이장손은 왜 태어난 때도 죽은 때도 알려지지 않는 것일까? 비격진천뢰를 발명하던 당시 나이가 몇 살이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이장손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이장손에 대한 궁금증 안고 금장대에 올라보니금장대는 경주성 수복 전투 당시 아군의 지휘 본부가 있었던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금장대에 올라 형산강 너머 경주 시내를 바라본다. 성을 쌓느라 진땀을 흘리는 고려와 조선의 백성들이 보이고, 왜적과 싸우느라 피를 쏟는 관군과 의병들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이 맑고 잔잔한 강물이 그들에게는 무척이나 낯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