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싶은 사람 김관홍'세월호 단원고 희생학생 장준영 군의 아버지 장훈씨가 고 김관홍 잠수사 납골당 앞에서 그를 추억하고 있다.
김종훈
2015년 12월 16일, 김관홍 잠수사는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에 관한 제1차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중요한 증언을 했다.
김 잠수사는 "세월호 참사 뒤 7월 10일까지 이어진 수색 과정에서 의료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밝히며 "오히려 국가가 잠수사들 사이에 갈등을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세월호 참사 현장에 자발적으로 모인 잠수사들은 세월호 희생자 가운데 292구를 수습하고 현장을 떠났지만 이에 걸맞은 대우를 받지도 못했다. 오히려 '하루에 100만 원을 벌었다'며 주변의 오해를 받았다. 대부분의 잠수사들은 참사 후 생긴 잠수병 등 트라우마를 앓아야 했다.
이런 가운데 수색구조 과정에서 민간 잠수사 한 명이 잠수 중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나자, 검찰은 민간 잠수사 가운데 최선임 잠수사를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형사 고발하기도 했다. 이후로 형사 고발당한 이 잠수사는 1년 4개월간 재판을 받으며 고초를 겪었다.
김 잠수사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세월호 참사 이후, 과도한 잠수 후유증과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잠수사를 더 이상 할 수 없어 아내와 함께 화원을 운영했다. 이것으로도 생계 유지가 어려워 밤마다 대리운전을 했다.
김 잠수사는 "2014년 12월 잠수사들에 대한 모든 치료 지원이 끊겼고, 1월에 언론을 통해 호소하자, 2월부터 한 달만 추가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며 "트라우마에 대한 정신과 약물치료는 7월까지 자비로 병원을 다녔다"고 밝혔다.
아픈 김 잠수사를 단원고 희생학생의 유족들이 안아줬다. 희생학생 장준영군의 아버지 장훈씨는 김 잠수사를 추억하며 "유가족 중 가장 먼저 나에게 형이라고 불러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잠수사가 생전에 힘들 때면 새벽에 전화가 와 힘들어 죽겠다고 울면서 말했다"고 전했다. 장훈씨는 "(김 잠수사를) 이렇게 보내니 못해준 기억만 난다"며 "그의 이야기를 더 받아줄 걸..." 하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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