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역 1번 플랫폼에 설치된 펜스 사이로 본 안중근 의사 의거지점. 역사 신축공사로 인해 역사적인 장소는 이미 사라져 있었습니다.
정수현
"빠~러~"
역무원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뉘앙스로 보아 그 뜻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역사적 장소.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역 1번 플랫폼.
1번 플랫폼은 존재했지만, 의거 지점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하얼빈역으로 가기 전에 온라인 포털사이트 검색해봤습니다. 2013년에 문을 연 안중근 기념관이 역사 신축공사로 휴관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의거 지점 자체가 사라졌다는 정보는 어디에서도 접하지 못했기에 무척이나 당혹스러웠습니다.
포털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안중근 의사의 저격 지점과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졌던 자리를 표시한 사진을 역무원에게 보여주며 재차 물었습니다. 역무원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펜스 사이를 보여주며 '저 위치였다. 이제는 없어졌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허탈한 마음으로 공사장 펜스 사이를 바라봤습니다. 남의 나라에서 오래된 기차역을 다시 짓겠다는데 그것을 가지고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헤이룽장성 당국에서 안중근 의사 기념관도 원래 위치에 2배로 확장해서 다시 개관하겠다고 했다니 그 말에 아쉬움을 달랠 수도 있겠습니다.
유럽 기차여행 꿈꿨던 청년 안중근그러나 해방 70년이 넘도록 안중근 의사의 유해조차 모시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의거 지점 바닥 타일이 그냥 평범한 콘크리트 덩어리일 뿐인지, 중국인들이 생각하듯이 우리도 그렇게 평범하게 생각해도 되는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중국이 하얼빈 의거 지점을 어떤 형태로 조성해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 우리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이런 무심하고 무감한 역사 인식 속에서, 혹여 우리가 원하는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안중근 기념관이 들어선다고 한들 무슨 할 말이 있을지 내심 우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 오전 7시에 도착해 '늙은 도적'을 기다리는 두어 시간 동안, 살아온 수십 년의 세월이 수천 번 머릿속을 스쳐 갔을 것입니다. 다방에서 마시는 차는 무슨 맛이고 무슨 향인지도 느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걸어가는 순간 러시아 의장대의 음악 소리가 들리기나 했겠습니까. 직접 얼굴을 본 적도 없이 오로지 신문에 실린 흐릿한 흑백사진 하나에 의지하여 감(感)으로 적을 찾는 그 발걸음은 수만 근의 무게였을 것입니다.
방아쇠를 당기던 찰나, '제발 총탄이 적의 심장을 관통하기를…'이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장남을 신부로 키워달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가 말입니다.
이제는 100년도 더 세월이 흘러 그날의 흔적은 모두 사라진 1번 플랫폼이지만, 상상만으로도 전율이 일어났습니다.
"꼬레아 우라! 꼬레아 우라! 꼬레아 우라!" 모든 것을 걸고 모든 것을 감내한 식민지 청년의 의로운 용기와 한 맺힌 외침에 가슴이 먹먹합니다.
지금이나 당시나 하얼빈역은 만주 지역 교통의 요지입니다. 역에는 수많은 철길이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파리와 이탈리아 여행을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던 평범한 서른한 살의 안중근. 사냥과 술, 사람을 좋아하던 호방한 사내는 마음먹기에 따라 유럽으로 향하는 열차를 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열차는 여기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안중근의 마지막 전장, 여순감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