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창덕궁 인정문. 연산군은 인정문 마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김종성
연산군은 신하와 백성들을 못되게 굴었다. 그런 임금이 이복동생한테 위해를 가하지 않고 편히 살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이복동생을 견제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정치적으로 유리한 입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연산군은 임금과 왕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런 뒤 세자에 책봉돼 후계자수업을 받다가 아버지가 죽은 다음에 왕이 됐다. 조선왕조 임금들 중에 이런 조건을 갖춘 이는 별로 없었다. 임금의 정통성이 주로 혈통에 의해 좌우되던 세상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연산군은 조건을 완비한 정통성 있는 군주로 출발했다.
왕이 콤플렉스를 느꼈던 이유 왕비가 아닌 후궁의 아들로 태어난 왕들도 있었다. 이 때문에 평생 콤플렉스를 느낀 왕이 사도세자의 아버지인 영조다. 심지어 왕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 왕도 있다. 선조는 '왕의 서자의 아들'이었다. 왕을 아버지로 두지 않고 할아버지로 두었던 것이다. 이 점은 선조를 콤플렉스 많은 왕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이 콤플렉스는 선조의 아들인 광해군의 불행과도 연계되었다.
이런 이들과 달리, 연산군은 왕비의 몸에서 임금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윤씨가 나중에 폐위를 당하기는 했지만, 연산군이 출생할 당시에는 왕비의 신분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왕비의 아들인 동시에 임금의 아들로 태어난 왕은 많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연산군은 장남의 지위로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었다.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형들을 제친 태종 이방원이나 셋째아들로 태어나 형들을 제친 세종보다 훨씬 유리했다. 세자도 아닌 세손의 지위에서 왕이 된 정조보다도 훨씬 유리했다.
또 연산군은 세자에 책봉된 뒤 후계자 수업을 거쳤다. 정종·중종·인조처럼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후계자 수업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왕들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그뿐 아니다. 연산군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정상적 절차를 거쳐 왕이 됐다. 아버지를 몰아내고 아버지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왕이 된 태종, 조카를 몰아내고 왕이 된 세조 수양대군, 할아버지가 죽은 뒤에 왕이 된 정조와는 차원이 달랐다.
비교적 완벽한 조건 속에서 즉위했던 연산군이처럼 연산군은 비교적 완벽한 조건 속에서 임금이 됐다. 전후의 다른 왕들과 비교할 때, 흠결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다수당의 공천을 받고 투표자 과반수의 지지로 대통령에 오른 사람과 비슷했다.
거기다 연산군은 안정적인 정치질서까지 물려받았다. 이 점은 그의 아버지가 성종(成宗)이란 묘호를 받은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묘호는 죽어서 종묘에 모셔질 때 받는 칭호다.
고대 중국의 서적 중에 <일주서>가 있다. 이 안에, 시호의 의미를 풀이한 '시법해'란 부분이 있다. 시법해에서는 성(成)의 의미를 "안민입정왈성(安民立政曰成)"으로 풀이했다. '백성을 편안케 하고 정치를 바로 세우는 것을 성(成)이라 부른다'는 의미다. 연산군의 아버지가 죽어서 성종이란 묘호를 받은 것은, 연산군이 왕이 될 당시의 정치 질서가 비교적 안정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성종은 훈구파라 불리는 보수세력이 권력을 독점하고 왕권을 위협하는 것을 견제하고자, 지방 출신의 사림파(유림파)를 중용하여 정치질서의 균형을 모색했다. 훈구파와 사림파를 상호 견제시키고 그 속에서 자신은 조정자·균형자가 되었다. 이런 정치실험이 성공한 결과로, 연산군은 훈구파와 사림파 어느 쪽도 권력을 독점할 수 없는 구도 속에서 임금이 됐다. 임금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넓은 상태에서 즉위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