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 부용당 성안의 선생 임란 창의비(사진 오른쪽 끝에 있는 붉은 건물은 사당이고, 그 오른쪽에 부용정의 지붕 일부가 보인다.)
정만진
그 후 조정에서 형조 좌랑, 사간원 정언, 예조 좌랑 등을 역임하던 성안의는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곽재우를 도와 종사관(대략 참모장)으로 화왕산성에 들어갔다. 산성 아래로 몰려왔던 가등청정의 군대는 화왕산성을 지키는 아군의 질서 정연한 태세를 보고는 그대로 물러갔다.
1598년에는 병조 정랑으로 재직하면서 경주, 안동, 의성 의흥, 영천, 울산 등지를 오가며 백성들을 구휼하는 한편 군량미를 조달하여 각 군대에 배분했다. 이때 명나라 군대에 양식을 제공하는 책임도 지고 있었다. 명군은 보리쌀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쌀만 받으려 하면서 창고 관리를 맡고 있는 조선 관리를 구타하는 등 행패가 심했다. 그런 때마다 성안의는 문제를 무난히 해결했지만 10월들어 마침내 군량이 떨어져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명군은 군사를 보내어 성안의를 체포하려 했다.
국방부 국장으로서 군량미 조달을 하러 다녔던 성안의그 순간 경주 부윤 박의장(朴毅長)과 함께 있던 성안의는 명군들에게 박의장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조도사(調度使, 군량 조달 책임자)"라고 말했다. 명군은 박의장을 끌고 갔다. 소식을 들은 경주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개인 곡식을 내놓아 하루만에 1만2천 석이 쌓였다. 그것을 명군에게 전달하자 박의장은 바로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