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피천 너머로 성류굴 입구가 보이는 풍경
정만진
경북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산30에 있는 성류굴을 답사할 때면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진별리 산262의 고씨동굴을 떠올리게 된다. 두 곳은 각각 천연기념물 155호와 219호로 지정된 동굴이라는 공통점 외에 역사적으로도 같은 아픔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고씨동굴은 임진왜란 때 고종원(高宗遠)이라는 선비가 가족들을 데리고 피란했던 곳이라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고종원은 아우 고종경, 고종길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대항한 선비이다. 당시 고종원은 55세의 고령이었다.
그는 고경명(高敬命) 의병장의 격문을 보고 감동하여 혈기 왕성한 젊은 아우 고종경과 함께 창의했다. 고종원은 칼을 휘두르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으므로 의병장은 아우 종경이 맡았다. 형제는 인근 지역에 통문을 돌려 군사를 모집하고 무기와 군량미를 준비했다.
고종원이 동굴로 들어간 때는 아우 종경이 이미 죽은 뒤였다. 그는 적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을 이끌고 동굴로 숨었지만 이내 포위되었다. 적은 1592년 8월 18일 동굴 입구에 연기를 피워 안에 숨어 있는 조선인들을 생포하려 했다. 고종원의 아내 조씨는 남편의 탈출에 자신이 걸림돌이 될까 걱정하여 동굴 속 깊은 물구덩이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편의 도주로를 확보하려고 자살한 아내아내의 비극적 선택에도 불구하고 고종원은 동생 고종길과 함께 적에게 사로잡혔다. 형제는 폭우가 심하게 쏟아져 주변이 어수선해진 틈을 타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추격해온 적에게 다시 붙잡혀 종길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아내와 두 아우를 전쟁 초에 잃은 고종원은 1592년 4월 20일부터 9월 6일 사이의 사건을 기록한 『기천록(祈天錄)』을 남겨 임진왜란 발발을 맞아 조선 백성들이 겪은 처참한 피란 생활을 증언했다.
▲고씨동굴 입구
정만진
성류굴에도 고씨동굴 못지않은 슬픔이 배어 있다. 전쟁이 터져 왜적이 들이닥치자 울진 사람들은 성류사의 부처를 동굴 안으로 모셨다. 성류굴(聖留窟)은 부처(聖)가 머문(留) 굴(窟)이라는 뜻이다.
상식적으로 불상만 성류굴 안으로 들어갔을 리는 없다. 주변에 살고 있던 백성들 500여 명도 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왜적이 알고 몰려왔다. 적은 백성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회유했다. 백성들이 나갈 리가 없었다. 왜적은 동굴 입구를 돌로 막아버렸다. 조선 백성 500명이 그 안에서 굶어죽었다.
지금도 동굴 입구 경사진 곳에는 바위들이 깔려 있고, 제 5광장 동쪽에서는 사람의 뼈가 발견되고 있다. 시간과 장소가 분명하고 증거물이 있으니 성류굴의 비극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전설로 받아들여진다.
성류굴 앞에서 생각해보는 임진왜란의 피해500여 백성들이 생매장되어 굶어죽은 성류굴 앞에서 임진왜란이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당연하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를 읽어본다.
'국토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고 정치·경제·문화·사회·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일본군의 잔학성은 형용할 수 없으리만큼 야만적이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약탈 분탕하였고 비전투원까지 학살하였다. (중략)본래부터 일본을 이적시하던(오랑캐로 보던) 우리 민족은 이러한 일본군의 만행으로 그들을 더욱 멸시하여 적대시하는 국민감정이 뿌리박게 되었다. 임진왜란 중의 의병장 등 열사와 논개틀 비롯한 많은 사민(선비와 백성)·부녀자의 순절은 도의적 생활의 모범으로서 추앙되게 되었다.'『한국사』의 관념적인 설명은 임진왜란에 대한 지식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 그에 견줘 『지봉유설』의 사실적인 기술은 전쟁의 참상에 대한 생생한 실감을 느끼게 해준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적 저술로 평가받는 대작으로, 이수광(李晬光)이 1614년(광해군 6)에 편찬했다.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서 여자와 어린이들이 마음대로 바깥출입을 못할 형편이었다. 굶어 죽은 시체가 쌓이면 사람들이 다투어 그 시체의 살을 떼어 먹었으며, 시체의 골까지 뻐개 그 진물을 빨아 마신 뒤 바로 그 자리에서 엎어져 죽었다. 쌓인 시체가 들판에 가득했으나 거두어 장사지내주는 자가 없었으며 아비가 자식을 팔고 남편이 아내를 팔아먹었다.'
▲고려 말 이색의 아버지 이곡은 321미터 절벽 아래에 성류굴이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동굴 안에 직접 들어가 본 뒤 후기를 남겼다. 그의 글은 우리나라 최초의 동굴 탐사기이다.
정만진
가전체 |
사물이나 동물을 의인화하여 초보적인 소설 형태로 창작한 문학 갈래이다. 이곡의 「죽(竹)부인전」은 대나무(竹)를 의인화한 작품이며, 최초의 가전체 작품은 설총이 신문왕(681∼692 재위)에게 들려준 「화왕계」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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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류굴은 동굴 중 가장 먼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자연 유산이기도 하지만 최초의 동굴 탐사기를 남긴 곳이기도 하다. 성류굴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는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가 바로 그 글이다.
성류굴 탐사기를 남긴 이곡은 이색의 아버지이색의 아버지인 이곡은 가전체(假傳體) 작품「죽부인전」을 지은 문장가로, 1333년(36세)부터 1344년(47세)까지 원나라에서 벼슬을 지내며 고려의 처녀를 공물로 끌고가던 공녀(貢女) 공출을 중단시킨 업적을 남겼다. 「동유기」 중 해당 부분을 읽어본다.
'울진현에서 남쪽으로 10리쯤 가니 성류사(聖留寺)가 나왔다. 절은 돌벼랑 아래 장천(長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돌로 된 절벽은 높이가 1,000척(321m)이나 되었는데 작은 동굴이 뚫려 있었다. 동굴 이름은 성류굴(聖留窟)이라 했다.'이곡은 1349년(고려 충정왕 1)에 「동유기」를 썼다. 이곡은 그 당시에도 동굴 이름이 '성류굴'이라고 했다. 1349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보다 243년 전이다. 1349년 이전부터 이 동굴에는 부처가 모셔져 있었고, 이름도 성류굴이었다. 이곡은 임진왜란 때 처음으로 이 동굴에 부처가 모셔졌고, 그 이후 성류굴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