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표지. <삼국사>란 제목이 적혀 있다.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김부식에게는 2대 원칙이 있었다. 첫째는 한반도 중심주의다. 북벌파를 물리치고 정권을 잡았으니, 한반도 중심주의를 정당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민족은 가급적 한반도에서 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합리화할 목적으로 그는 <송서>·<양서>·<남사> 같은 중국 역사서에도 나오는 백제의 북중국 일부 점령을 숨겼다. 또 훗날 청나라 정부가 발행한 <만주원류고>에도 나오게 될 신라의 중국 길림 땅 점령 역시 숨겼다.
물론 백제와 신라의 중국 점령이 장기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국 역사서에 실릴 만큼 비중 있는 사건이었던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런데도 김부식은 별다른 명분 없이 이런 사실들을 <삼국사기>에서 배제했다. 한편, 백제·신라의 중국 진출은 숨기면서도 고구려의 만주 땅 지배를 숨길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너무나 명백한 사건이라 도저히 은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부식이 한반도 중심주의 다음으로 적용한 원칙은 신라 중심주의다. 김부식은 신라가 멸망한 지 140년 뒤인 1075년에 출생한 신라 왕족 후예다. 그는 경주 김씨였다. 신라 멸망 140년 뒤에 태어났으므로 그에게는 신라 왕족 의식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묘청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면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자기 집안 조상들의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그는 한반도 중심주의라는 대전제를 훼손하지 않는 범주에서 신라 중심주의를 관철시켰다. 장수태왕이 건립한 광개토태왕릉 비문, 김부식 자신이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고구려 예언서, <삼국사기>에 인용된 당나라 고종황제와 가언충의 대화 등에 따르면, 고구려는 기원전 4세기에 건국된 나라였다. 하지만, 김부식은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건국됐다고 못을 박았다.
신라 중심주의 역사왜곡... 가야사를 배제하다그가 그렇게 한 것은 기원전 57년에 건국된 신라보다 늦게 세워진 나라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고대에는 건국 연도의 선후를 근거로, 현존하는 국가 간의 서열을 정했다. 그래서 고구려 건국 연도를 신라 건국 연도 보다 늦춰 잡았던 것이다.
신라 중심주의를 목적으로 그가 벌인 또 다른 역사 왜곡은 가야사를 배제하는 것이었다. 흔히 말하는 삼국시대라는 기간은 실제로는 106년밖에 안 된다. 서기 42년에 수립된 가야연맹이 망한 때는 562년이고, 백제·고구려가 모두 망한 때는 668년이다. 562년에서 668년까지는 106년간이다.
신라는 기원전 57년부터 서기 935년까지 991년간 존속했다. 991년이란 기간 중에서 신라의 경쟁자가 고구려·백제 두 나라뿐이었던 삼국시대는 고작 106년간이다. 그런데 신라의 경쟁자가 고구려·백제·가야 세 나라였던 사국시대는 42년부터 562년까지의 520년간이다. 이런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김부식은 자신의 역사서를 4국이 아닌 3국의 역사로 만들었다.
사실, 신라 입장에서는 고구려·백제보다도 가야에 대한 감정이 더 좋지 않았다. 어느 나라든 간에 바로 옆에 있는 나라에 훨씬 더한 악감정을 갖기 마련이다. 가야는 신라와 인접했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신라를 괴롭혔다. 그래서 가야에 대한 신라인들의 감정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가야 역사서인 <가락국기>에 따르면, 신라 왕실의 일원으로 편입된 석탈해는 처음에는 가야에 정착하려 했다가 김수로한테 패해 신라로 도망했다. 이래서 신라 왕실 사람들은 가야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가야사 복원, 역사 왜곡 바로잡는 계기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