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8일, 서울 계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군 형법 92조 위헌판결 촉구를 위한 1500인 탄원서 제출'기자회견에서 군 관련 성소수자 임권 침해,차별 신고 및 지원을 위한 네트워크 회원들과 동성애 관련 단체 대표들이 헌법재판소의 빠른 판결을 촉구하는 내용의 회견문을 낭독하고 있다. (가운데 기자회견문을 읽는 사람이 한가람 변호사) 군 형법 제92조는 군대 내의 성적 문제를 규율하고 있는 조항으로 동성애를 차별할 소지가 있다고 성적 소수자 단체들의 평가를 받아왔으며, 지난 2008년 8월 육군 제22사단 보통군사법원이 헌법 침해의 소지가 있다며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한 바 있다.
연합뉴스
이 한 장의 사진.
천주교인권위원회 김덕진 사무국장이 써주신 기사(
"볼수록 의문... 단 두 줄짜리 최악의 법조문")에 삽입된 사진이다. 군형법 제92조의6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김덕진 사무국장님이 굉장히 잘 써주셔서 보탤 것이 없다. 다만 이 사진을 보며 문득 떠오르는 것은 지난 10년간 이어져 온 군형법상 '추행'죄 폐지를 위한 활동들, 그리고 이 활동을 벌여온 '군 관련 성소수자 인권침해, 차별 신고 및 지원을 위한 네트워크(군 관련 성소수자 네트워크)'에서 함께한 사람들이다.
군 관련 성소수자 네트워크는 2008년에 만들어졌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행성인)와 친구사이, 한국성폭력상담소,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이 주도하여 결성했다. 2006년과 2007년 연달아 크게 이슈가 된 군대 내 성소수자 병사 인권침해 사건 직후였다. 행성인과 친구사이 등에서는 이 사건들의 피해자들을 지원했다.
군대에서는 성소수자 병사에게 정체성 입증을 위한 성관계 동영상 등을 요구하고 성폭력과 아우팅 피해 등으로 건강까지 해치게 했다. 이 일들을 거치면서 단체들은 좀 더 전문적으로 '솔루션 테이블'을 만들어야겠다며 뜻을 모았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성소수자 군인에 대한 차별과 인권침해의 배경에 성소수자 혐오를 제도화한 조항인 군형법상 '추행'죄가 있고, 또 인권침해와 차별을 막기 위한 군대 안의 인권에 관한 제도적 보장이 미비하다는 점을 인식하며 출범했다.
법으로 동성애를 '추행'으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하며이 연대체의 결성 무렵, 대법원에서는 이 조항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군형법상 '추행'의 의미를 "동성애 성행위 등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성적 만족 행위로서 군이라는 공동사회의 건전한 생활과 군기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판결이었다.
동성애는 대법원에 의해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혐오감을 일으키는 부도덕한 것이 되었다. 이 판결의 결과, 기소된 중대장은 무죄를 받았다. 그에 대한 공소사실은 "다수인이 왕래하는 복도 등에서 중대원인 다수 피해자들의 양 젖꼭지를 비틀거나 잡아당기고 손등으로 성기를 때린" 일이었다. '성적 만족 행위'인 동성애가 아닌 이 남성 간 성폭력은 무죄가 되었고, 동성 간 사랑은 유죄가 되었다.
우리는 즉각 성명을 내고 이 조항에 대한 폐지를 요구했다. 그러던 중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군사법원이 직권으로 군형법상 '추행'죄에 대해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했다는 것이었다. 군형법을 누구보다도 많이 적용하는 군사법원 스스로, 이 조항이 불명확해서 어떻게 적용할지 알기 어렵고, 동성애자 군인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평등권을 침해한다고 인정한 것이었다.
군 관련 성소수자 네트워크에서는 이 위헌제청결정을 환영하면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한국여성단체연합, 인권단체연석회의 등 여러 단체들로부터 이 조항의 위헌성을 지적하는 의견서를 각각 모아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 그리고 거리에 나가 탄원서를 받기 시작했다.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더 어려웠던 그때, 실명과 주소, 정자로 쓴 서명을 담은 탄원서에 성소수자들은 이름을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 조항에 대해 "군대 내 성폭력은 막아야 하지 않나요?"라고 되묻는 등 이 조항이 '동성애 처벌법'이라는 사실도 잘 알기가 어려웠다. '추행'이라는 이 법조항 표제의 의미가 '성추행'이 아니라 동성애를 '추한 행위'라고 한 것이라 설명을 해도, 법조인들도 당연히 성폭력을 처벌하는 법인 줄 아는 이 법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탄원서 제출 캠페인을 지지하면서 기꺼이 탄원서에 서명하고, 탄원용지를 가져가서 가족과 친구를 비롯해서 주변의 서명을 받아오시는 분들도 많았다.
더운 한낮의 서울시내 거리에서 탄원 캠페인을 벌여나갔다. 활동가들의 얼굴이 익어갔다. 동성애에 반대한다며 화를 내는 시민도, 성소수자는 괜찮지만 군대에서는 안 된다는 사람도, 한국에 '소도미법(Sodomy law)'이 있는 줄 몰랐다며 서명을 하고 가는 외국인도 있었다. 행성인과 친구사이 회원들은 낮과 밤의 거리를 뛰어다녔다.
그래서 끌어모은 것이 1500명이었다. 지금이야 적어보이지만, 당시로서는 각각 한 장의 탄원서로 1500여 장을 모은 것은 성소수자 운동 역사에 남을 일이었다. 허망하게도, 보수 개신교 교회에서는 하루에도 수만 장의 합헌 결정 촉구 탄원서를 받아서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헌법재판소에 제출해야 했다. 2010년에는 2차로 2437장의 탄원서를 모았다.
위의 사진은 그 1차 탄원서를 제출하며 열었던 2009년 여름 기자회견의 장면이다. 보다시피 기자회견에 참여한 사람도 적어, 한 명이 발언하면 현수막을 잡을 사람을 교대해야 하는 그런 처지였다.
군형법 제92조의6 폐지, 너무 늦진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