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에어컨아리안계 여성들은 버스 천장에 달리는 에어컨 위치를 가리키듯 손가락질을 하며 에어컨이 되는지를 물었다.
고기복
오랫동안 이주노동자들을 만나며 그들의 언어습관에 익숙하고, 많은 동남아시아 대중교통을 경험해 봤던 나는 아리안계 여성이 무슨 뜻으로 '에이씨, 에이씨 풀'이라고 하는지 금세 눈치챘다. 아리안계 여성들은 "그 버스는 에어컨이 빵빵하냐"는 뜻으로 묻고 있었다. 동남아에서는 에어컨이 작동하는 버스와 작동하지 않는 버스는 가격 차이가 상당하고, 서비스 품질도 다르기 마련이다. 모든 차량이 에어컨 작동이 되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며 표를 예매하는 경우가 없는 한국에서는 생소한 풍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창구 직원은 '에이씨'라는 말에 말문이 막힌 듯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한국 욕인지, 영어 단어인지 구분하지 못해서인지 모르지만, 뜬금없는 질문에 가만히 있자, 아리안계 여성이 다시 말을 이었다.
"에이씨, 에어컨디션?""에어컨디션!"
그제야 창구 직원은 외국인이 원하는 게 무슨 뜻인지 감을 잡았다. 양측의 대화는 다시 이어졌고, 아리안계 여성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표를 사고 터미널을 떠났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터미널을 나서는 그들을 보며 이주노동자 한국어교실에서 공부하는 이주여성들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양측이 버스표 예매를 위해 서로 열심히 이야기하는 동안 뒤에 줄을 서 있던 다른 한국인들은 묵묵히 있었다. 갈 길 바쁜 사람들이었다면 다들 한 마리 했겠지만 드문드문 버스가 있는 곳이라 그런지 손님들은 양측이 실랑이를 하든 말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기다려줬다. 참 후한 인심이었다.
아리안계 여성들은 에어컨 빵빵한 버스를 타고 다음 날 어딘가 갈 모양이다. 창구 직원은 "에이씨 에이씨 풀"이라는 말에 상대방이 바보라고 욕하고 있는 건 아닌지 순간 당황했는지 모른다. 버스를 타면서 에어컨 빵빵하냐고 묻는 경우가 흔치 않은 대한민국에선 '대략 난감'이었을 상황을 창구 직원은 잘 감당했다. 미소가 고운 사람이었다. 상황이 끝나고 환하게 웃는 창구 직원은 영어가 서툰 외국 여성들을 위해 수준을 맞춰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지혜의 왕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했던 '듣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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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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