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
정누리
아침을 든든히 먹은 뒤 삿포로 시내를 구경하다, 한 조그마한 카페를 발견하였다. 거칠게 덧입힌 아크릴 느낌이 나는 검정색 문을 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몇 없는 테이블 한 구석에 조심스레 앉았다. 창가 쪽에는 왠지 푸근한 아저씨가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영자신문을 읽고 있었다. 또 반대편에는 우아한 베레모를 쓴 할머니와 할아버지 셋이서 수다를 떨고 계셨다. 머리가 희끗한 할아버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은 듯 껄껄 웃었다. 나는 종업원에게 조심스레 아메리카노와 레어치즈 케이크를 주문했다. 그런데 갑자기 "원두 로스팅은 어떻게 해드릴까요?"라고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은 척 웃으며 말했다. "미디엄으로요."
나는 사실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1년 가까이 일했던 커피숍에서도 커피를 마신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 왜 아메리카노를 시켰느냐고? 그냥 그래야할 것만 같았다. 여행을 왔으면 모든 것을 즐겨보아야 한다는 것이 내 나름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맛이 없으면 그건 그것대로 경험이니까…. 드디어 커피가 나왔다. 나는 많이 마셔본 척 향을 킁킁거리다 이내 한 입을 홀짝였다.
아! 일본에서 나를 놀래 킨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가지, 토마토, 생강…. 이것들의 공통점이 뭐냐면, 다 내가 한국에서 전혀 먹지 않는 음식이라는 것이다. 또한 일본에서 어쩔 수 없이 먹어본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처음 나의 혀를 감싸는 순간 나는 정말 '헉'소리가 날 수 밖에 없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왜 이렇게 달고 맛있는 거지? 내가 여태까지 알고 있던 맛은 무엇이란 말인가? 전혀 물컹하지도, 맵지도 않고 목의 갈증을 탁 해소시켜주는 그야말로 '시원한 맛'이었다! 갑자기 이 말을 왜 하냐면, 지금은 이 '놀라움 리스트'에 아메리카노가 추가되는 역사적인 순간이기 때문이다.
쓰거나 텁텁하지 않고 그야말로 커피가 '시원'했다. 온몸의 관절이 쑤실 때, 뜨끈한 온천에 몸을 푹 담군 느낌. 절로 "아, 시원하다"라는 말이 튀어나오게 하는 마성의 늪. 나는 지금 그 늪에 빠진 것이다. 몇 만보를 걸어 잔뜩 피곤해진 몸뚱이가 절로 실타래마냥 풀어졌다. 함께 나온 레어 치즈케이크는 내가 먹어본 것 중에 가장 탱글하고 쫄깃했다. 카페 분위기가 워낙 차분하고 조용한 덕분에 나는 열심히 속으로 호들갑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