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읽는 선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의 다산 유적지(정약용 유적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그렇지만, 선비가 된 지배층은 자신들의 본질을 교묘히 감추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는 이론을 들고 나왔다. 이것은 불로 계층인 자신들의 지위를 교묘히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비가 된 지배층은 세상의 직업을 사농공상이라는 4대 직업군으로 분류하고 이를 기초로 국가의 산업정책을 결정했다. 그들은 농·공·상 위에 선비 '사'라는 직업군을 배치하고 이 직업군이 지식인 겸 정치인으로서 세상을 지배하는 게 정당하다는 논리를 유포했다.
이런 논리에 힘을 실어준 것이 제자백가의 사상이다. 중국 춘추시대 정치가인 관중의 사상을 정리한 <관자>의 유관(幼官) 편에서는 "종묘를 안정시키고 남녀가 짝을 짓도록 하며 직업을 넷으로 나누면, 위엄을 세우고 덕을 베풀 수 있다"고 말했다. 직업을 넷으로 나누는 사농공상 분류법을 토대로 나라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사' 계급의 지배가 정당하다는 인식은 <맹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 책의 등문공 편에는 "대인(大人)의 일이 있고 소인(小人)의 일이 있다"고 했다. 지배층이 할 일이 따로 있고 피지배층이 할 일이 따로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 뒤에 이런 말이 나온다.
"정신력으로 일하는 사람은 남을 다스리고, 육체적 힘으로 일하는 사람은 남한테 다스려진다. 남한테 다스려지는 사람은 남한테 먹을 것을 주고, 남을 다스리는 자는 남한테서 먹을 것을 받는 게 천하의 공통된 의리다." 선비의 외형을 띤 지배층은 이런 사상들을 기초로, '사'가 직접 노동에 종사하지 않고도 농·공·상을 지배하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를 유포했다. "사농공상은 하늘이 내리신 구분"이라는 말도 그들은 서슴지 않았다.
모순적인 사농공상 분류하지만, 사농공상 분류법에는 모순이 있었다. 농·공·상은 직접 산업생산과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사'는 그렇지 않다. '사'는 산업생산과 직접 관련이 없다. '사'는 세상을 가르치고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을 지칭했다. 농·공·상은 경제적·산업적 개념이지만, '사'는 정치적·교육적 개념에 가까웠다. 차원이 전혀 다른 '사'와 '농·공·상'을 하나로 묶어놓았던 것이다.
'사'는 책 읽고 정치하는 모습만 띠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노비와 토지를 대량으로 소유한 지주계급이었다. 그들은 세상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로 인해 생긴 불로소득을 기초로 그들은 책 읽을 시간을 얻을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세상을 다스릴 시간적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노비 및 토지의 주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농공상으로 분류하기보다는, 소유주란 의미의 주(主)를 써서 주농공상으로 분류하는 게 경제적·산업적으로 훨씬 더 적합했다. '사'는 실제로는 노비주인이자 땅 주인이었으므로 그들을 主로 표현하는 게 사실은 더 정확했다.
하지만 그런 정직한 분류법을 표방했다면, 지주계급이 농·공·상을 착취하면서 불로소득을 취하는 부조리한 구조가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주계급에 대한 농·공·상의 저항이 한층 더 강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부조리를 감추는 방법 중 하나가, 지배층을 '사'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지주계급이 가진 여러 모습 중에서 책 읽고 나라 다스리는 측면만을 부각해 이들을 '사'로 표현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농공상이라는 분류법이 나온 것이다.
선비로 모습 바꾼 지배층, 천 년간 득세958년 과거제도 시행 이후로 선비로 모습을 바꾼 지배층은 사농공상이란 분류법을 토대로 약 천 년간 지배권을 행사했다. 1910년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이들은 노비주인이나 땅 주인이 아닌 선비의 모습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의 경제적 이해관계로부터 초연한 학자의 이미지, 특정 집단이 아닌 국가 전체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정치가의 이미지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드라마 <군주>의 편수회처럼 그렇게 탐욕적이고 노골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조선 시대에는 등장하기 힘들었다. 물론 탐욕스런 지주들이 사회적 지탄을 받고 살주계의 테러 공격을 당하는 일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주들은 선비의 외형을 유지하면서 '돈보다는 세상을 걱정하는 사람'으로 자처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대중에 대한 경제적 착취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사'라는 가면 뒤에 숨어 교묘하게 세상을 지배하고 착취했다. 덕분에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세상의 반감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지금의 재벌보다 훨씬 더 교묘하고 '스마트'했다.
지탄과 저항에 직면한 한국 재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