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빨강머리 앤>의 한 장면.
후지tv
"저는 지금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렸어요!!"
어른들이 별일 아니라고 치부하는 작은 일에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슬픈 기분이 들거나 혹은 환희에 가득차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때, 빨강머리 앤만이 나를 이해해 줄 것 같았다. 앤과 다이애나가 마릴라 아주머니가 구워준 쿠키로 피크닉 가방을 들고 들판과 강가로 소풍을 갈 때, 나는 집에 있는 '오예스'와 '마가레트'를 챙겨 동네 공터로 친구와 같이 '상상 피크닉'을 갔고, 앤이 교회 피크닉에서 난생 처음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면을 보고는 냉장고 있던 돼지바를 꺼내 종이컵에 포장해 공터에 가 먹었다.
앤이 되려면 다이애나가 있어야 했기에 가장 친한 동네 친구를 다이애나라고 생각했고 그 친구가 만화 속의 다이애나와는 다르게 감상적인 면을 받아주지 않을 때는 혼자 상상 속의 다이애나를 만들었다. "어머 이것 봐, 너무 아름다운 풍경이지 않니? 장미꽃이 아주 아름답구나." 뭐 이런 말들을 허공에 중얼대면서 다닌 것이다. 나 또한 남들이 보면 오글거리는, 마릴라 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허영과 감상에 가득찬' 아이였다.
넉 놓고 봤던 그 장면지금이라면 보고 있기조차 민망한 드라마 퀸, 바로 그것이 빨강머리 앤이 가진 매력이자 어린 시절 나를 비롯해 감상에 쉽게 빠지는 소녀들을 공감케 한 지점이다. 빨강머리 앤은 캐나다의 소설가 루시 M 몽고메리가 1908년 발표한 성장소설이지만 우리에겐 일본 후지 TV의 50부작 애니메이션으로 더 익숙하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림체, 클래식 BGM과 원작 소설의 대화를 상당수 살린 연출, 그리고 남성 나레이션을 삽입한 다큐멘터리적 요소까지 그 모든 것이 평화롭게 딱 떨어지는 만화였다.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연출로 1979년 후지 TV에서 방영을 시작해 총 50편이 제작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선 1986년부터 상영되어 인기를 끌었다. 맨 처음 앤을 보기 시작한 이래로 TV에 앤이 나오면 그 앞에 앉아 봤던 걸 또 보곤 했다.
사실 애니메이션의 빨강머리 앤은 항상 기쁨에 차 있고, 그에게 일어난 슬프고 비극적인 일도 항상 긍정적으로 마무리되어 시골 생활이 꽤나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보면 생활감이 더 자세하게 드러나서 앤의 고난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애니메이션에선 책에 나오는 온갖 잼과 과일 콤포트, 쿠키, 케이크 등을 정말로 먹음직스럽게 묘사하기 때문에 앤이라면 역시 이 후지TV 버전이 좋다.
"사람들은 저에게 거창한 말을 쓴다고 비웃지만 거창한 생각이 있을 때 거창한 말로 표현하는 게 맞지 않나요?"
작은 것에도 "정말 낭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라고 한다거나, 또 금세 "저는 지금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어요"라며 거창하게 말하는 앤에게 마릴라 아주머니는 "너란 아이는 도무지", "난 공상따위는 딱 질색이다", "넌 정말 쉬지도 않고 지껄이는 구나" 등등의 말로 대꾸를 한다.
어린 시절에는 마릴라 아주머니는 딱딱하고 너무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 마릴라 아주머니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감상에 빠진 어린 아이의 말이란 정말 듣고 있기 힘든 것들이 많아서 자칫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질리거나 싫다는 생각이 들기가 쉬운데 마릴라 아주머니는 앤을 아직 어른이 덜 된, 그러니까 아직 인간이 덜 된 아이가 아닌 한 명의 어엿한 인간으로 대접했으니 말이다.
아무리 마릴라 아주머니가 근엄한 표정으로 면박을 줘도 앤은 "염려 마세요~"라거나, "전요, 이럴 때에는 이런 기분이 든단 말이에요" 등등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뻔뻔한 면모를 보이기에 애니메이션은 끝끝내 우울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다시 보면 좀 우스꽝스러운 구석도 있다. 감상에 가득찬 앤의 대사 또한 묘하게 현실과 붙어 있어서 리얼하다. 그러니까 앤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
"저는 지금 너무 비참해요. 아주머니 저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기독교적인 연민이 있다면 이런 처지에 빠진 저에게 설거지를 하라고 하진 말아주세요." 정말 감상에 빠진 어린 아이가 할 법한 말 아닌가? 앤은 또한 '허영이 많은 아이'로 묘사되는데 그 이유는 '어깨가 봉긋 솟은 블라우스'를 입고 싶어 한다든가, 자신의 빨강머리와 비쩍 마른 몸에 엄청난 콤플렉스가 있고 항상 더 예뻐질 수 있기를 기도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때면 마릴라 아주머니는 "겉모습에 집착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등등의 말로 앤을 진정시킨다. 앤의 가장 친한 친구 다이애나는 앤이 엉뚱하리만큼 감상에 젖은 말을 할 때면 "어머, 앤~" 하며 웃어 넘긴다. 시트콤으로 만들어도 될 만큼 캐릭터의 조합이 좋다.
지금은 대책없이 위안을 주는 존재